조선왕조실록과 일본사에 나오는 기록을 통해 스페인이 일본임이 확실하다.
이 자료를 반박할 어떤 이도 없다.
□ 3천리 유배 기록 (3천리는 1,726km임)
한반도 길이는 다 해봐야 960km밖에 안된다.
조선왕조실록엔 3천리 유배를 보냈다고 나온다.
3천리는 한반도보다 크기 때문에 한반도는 우리역사의 주 무대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엔 하나의 도 크기가 3천리가 넘었다.

□ 정약용의 행정구역 개편 도서 경세유표
하나의 도가 수천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 12성이라고 하면 12×3천리(1,726km) = 전체 길이는 20,712km가 된다.
『경세유표』 제3권 「천관수제·군현분예」정약용은 조선의 행정구역을 기존 8도에서 12성(省)으로 나누자는 구상을 제시한다.원문은 다음과 같다. 京畿曰奉天省。次南曰泗川省。次南曰完南省。又南曰武南省。東南曰嶺南省。 其西曰潢西省。自京而東曰洌東省。自京而西曰松海省。又西曰浿西省。又西曰淸西省。 自京而北曰玄菟省。又北曰滿河省。總之爲十二省也。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정약용이 이렇게 말한다. 西路北路,壤地曠遠,監司坐於初界,遙制數千里之地。 서로(평안도)와 북로(함경도)는 땅이 넓고 멀어서, 감사가 경계의 초입에 앉아 수천 리의 땅을 멀리서 통제하고 있다. 라고 한 것다. 정약용은 그래서 평안도와 함경도를 각각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기존 한 도의 관할 범위가 수천 리에 달할 정도로 넓어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



□ 아란타(네덜란드 하란)은 '일본의 속군' 식민지였다는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아란타-네덜란드가 일본의 속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스페인이 아니고는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다.
열도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지배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

□ 일본은 조선에서 '해양 만리에 치우쳐' 라고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일본은 해양 만리에 치우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아메리카 대조선의 동쪽 만리 떨어진 곳이 스페인 반도이다.
한반도에 적용하면 길이가 맞지 않는다.


□ 일본은 엄청나게 큰 나라 (8도 66주 6백 32군이 있었음), 대마도는 남북이 3백 50리(201km)로 현 부산밑 대마도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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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록12권, 순조 9년 12월 2일 정해 2/2 기사 / 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 국역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에는 팔도(八道)가 있는데, 도(道)에는 66주(州)가 있고 주에는 6백 32군(郡)이 있으며, 군(郡) 이외에는 3도(島)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관백(關白)의 명령을 따릅니다. 관백은 무장주(武藏州)에 있고 왜황(倭皇)은 대화주(大和州)에 있습니다. 대저 축인방(丑寅方)에서 시작되어 손사방(巽巳方)에까지 뻗쳤으며, 대마도(對馬島) 남쪽에서 섭진주(攝津州)의 대판성(大坡城)에 이르기까지의 수로(水路)가 모두 합계하면 2천 4백 30리(里)입니다. 1. 대마도는 남북이 3백 50리이고, 동서는 7, 80리가 되는 곳도 있고 5, 60리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본래 성루(珹壘)는 없고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있으며, 가로(街路)는 협애하여 모두가 깊숙한 산협(山峽)이며, 가옥은 위로 중첩되게 지었는데 모두 높은 절벽 위에 있습니다. 층층으로 된 바위와 자갈로 이루어진 등성이 사이마다 선창(船艙)을 설치하여 놓고 출입하는 것을 기찰(譏察)합니다. 개간하여 경작할 만한 전토(田土)가 없고, 단지 송죽(松竹)·종려(棕櫚)·등감(橙柑)·동백(冬栢)이 하늘을 뒤엎을 듯이 무성한 것만 볼 수 있는데, 언제나 비오고 바람부는 날이 많습니다. 대마도의 북쪽에는 악포(鰐浦)와 좌수포(佐須浦)가 있는데 저들과 우리의 선박(船舶)이 모두 여기를 통하여 왕래하며, 이를 대풍소(待風所)라고 합니다. 대풍소에서 북으로 부산포(釜山浦)에 이르기까지가 4백 80리(里)이고 남으로 대마도 부중(府中)까지가 3백 20리 입니다. 1. 대마도의 민호(民戶)는 1만 5천여 호(戶)이고 전세(田稅)는 피모(皮牟)와 잡곡(雜穀)으로 받는데 모두 3만여 표(俵)가 되고, 우리 나라에서 하사하는 공작미(工作米)와 겸대(兼帶)한 미태(米太)까지 아울러 2만여 석(石)이 됩니다. 1표(俵)는 우리 나라의 관두(官斗)로 따져서 8두(斗) 6승(升)이 들어갑니다. 온 대마도가 먹고 사는 것을 오로지 우리 나라에 의존하고 있는데, 해촌(海村)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호에 따라 배를 지급하여 주고, 산촌(山村)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구(家口)마다 총(銃)을 지급하여 생활하게 합니다. 부민(富民)이라고 할지라도 비단옷을 입을 수 없고, 집은 모두 기와로 덮었으며, 곤궁한 백성은 감저(甘藷)를 식량으로 삼습니다. 1. 대마도 도주(島主)는 2년 동안은 도내(島內)에서 일을 처리하고, 1년은 강호(江戶)에 가서 알현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고 있는데, 강호에는 도주의 처자(妻子)와 제택(第宅)이 있습니다. 66주(州)의 태수(太守)들이 모두 이렇게 하는데 이는 볼모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강호에서는 우리 나라를 말할 수 없이 우러러보고 있기 때문에 매번 도주가 가서 알현하는 시기가 늦다고 여기고 있으며, 대마도는 우리 나라와 매우 가까이 있으므로 각별한 우대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주(各州)의 태수들이 흠탄(欽歎)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서화(書畵)를 마치 금옥(金玉)처럼 여겨 구득하면 곧 보물처럼 보관합니다. 국법(國法)은 귀천(貴賤)·남녀(男女)를 막론하고 6, 7세 때부터는 언문(諺文)을 가르치는데, 이를 이름하여 ‘가나[假名]’라고 하며 공사(公私)의 문서는 모두 이 ‘가나’를 사용합니다. 진문(眞文)의 관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서(試書)를 알고 해서(楷書)·초서(草書)를 대략 이해하는 사람이면 곧 이 자리에 차임합니다. 궁시(弓矢)가 있기는 합니다만 별로 익히는 일이 없고, 또 채찍질을 가하면서 말을 달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예는 단지 긴 칼과 짧은 총을 가지고 하였고, 행진은 한줄로 대(隊)를 지어 물고기를 꿰미에 꿰듯이 나아갔습니다. 교련법(敎鍊法)은 오로지 《위료자(尉繚子)》173) 를 가르쳤습니다. 1. 곤장(棍杖)이나 편태(鞭笞)로 형벌하는 법이 없고, 죄가 있으면 그때마다 주륙(誅戮)을 가하였으며, 관직에 있는 사람의 가벼운 죄는 그 집을 금고(禁錮)시키고 온 집안을 폐호(閉戶)시키며, 소민(小民)을 신문해야 할 죄가 있으면 물을 배가 부르도록 먹이고 횡목(橫木)을 배위에 굴려서 실정(實情)을 알아내는데, 신문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노예로 삼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습관이 없는데, 혹 뒤섞여서 죄를 받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앞다투어 사실을 자백하면서 죽는 것을 흔쾌히 여겼습니다. 예악(禮樂)의 문식(文飾)을 모르고 단지 법이 잔인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 뿐이었습니다. 1. 공복(公服)은 대략 단령(團領)과 같은데, 앞뒤를 단폭(單幅)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는 넓어서 노끈으로 끝을 묶었습니다. 머리에는 일각건(一角巾)을 썼는데 그 모양이 굽이 없는 나막신[木屐]과 같았습니다. 이를 이름하여 풍절건(風折巾)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책이 낮은 자는 위에는 소매가 큰 옷을 입고 아래로는 긴바지를 늘어뜨렸으므로 다닐 적에는 반드시 땅에 끌렸습니다. 머리에는 피변(皮弁) 모양처럼 생긴 일각건(一角巾)을 썼는데, 이름하여 ‘시오모자(侍烏帽子)’라고 하였습니다. 소매끝을 노끈으로 묶고 긴 바지를 땅에 끌리게 하는 것은 만일 죄를 범하였을 경우 나획(拿獲)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큰 공회(公會)가 아니면 머리에 관(冠)을 쓰는 일이 없습니다. 정수리의 머리털은 죄다 깎아내고, 단지 노골(露骨) 뒤의 머리털을 사용하여 위로 거두어 올려 꼬부려서 잡아맨 다음 밀유(蜜油)를 바릅니다. 몸에는 주의(周衣)를 입었는데 흑색이었고, 허리에는 큰 띠를 둘렀는데 반드시 긴 칼을 꽂았습니다. 본래 상하의 속옷은 없습니다. 여자들의 옷도 이와 같은데 수식(首飾)이 있습니다. 1. 대마도의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며, 이예주(伊豫州)의 산에는 동철(銅鐵)이 나는데 채취하여도 고갈되는 일이 없습니다. 유기(鍮器)는 일체 엄금하고 일상 생활에는 모두 목기(木器)와 목저(木筯)를 사용하며, 반찬은 해어(海魚)·해채(海菜)·녹육(鹿肉)·산약(山藥)·우방(牛蒡)174) 등속인데, 그 맛이 매우 담박합니다. 비록 천인(賤人)일지라도 차[茶]를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저 재용(財用)을 매우 아끼는데, 인구는 날로 늘어나 도세(島勢)가 점점 쇠잔(衰殘)되어 간다고 합니다. 1. 공해(公廨)와 사실(私室)은 매우 정밀하게 하기를 힘쓰지만 단청(丹靑)은 칠을 하지 않습니다. 재목(材木)은 모두 가느다란 것이며, 벽은 흙을 쓰지 않고 얇은 판자로 꾸미며, 사면(四面)은 모두 장자(障子)로 되어 있으므로 밀어 옮기고 여닫아도 문의 지도리나 문고리를 볼 수 없습니다. 대소(大小) 간가(間架)는 척촌(尺寸)도 어긋나지 않으며, 온돌방을 만들지 않고 단지 마루만 설치하여 두터운 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잡니다. 가첨(家籤)과 가구(街口)에는 저수통(貯水桶)을 설치하며, 금화(禁火)하는 무리를 많이 동원하여 주야로 순경(巡警)하게 합니다. 1. 연향일(宴享日)에 신 등이 도주(島主)의 집으로 갔었는데, 성(城)은 덮은 것이 없고 문(門)은 동서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협문(夾門) 밖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는데, 거기에서 염내(簾內)로 들어가서 도주와 서로 접견하였습니다. 그 집의 벽은 금(金)으로 칠을 하였고, 나이는 이제 38세인데 인품이 순후(淳厚)하였습니다. 풍절건(風折巾)을 쓰고 자단령(紫團領)을 입었는데, 그의 뒤에는 칼을 잡은 사람들이 옹립(擁立)하여 있었습니다. 명을 봉행하는 사람과 부리는 사람들은 황색(黃色) 단령(團領)을 입었고 모두 부복(俯伏)하여 명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재판(裁判) 이하 제역(諸役)들은 밖에 물러나 있는데 조용하여 떠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희자(戱子)175) 를 설행하였는데, 한단(邯鄲)·몽원(蒙猿)·인도(靭道)·성사(成寺)·수인(首引) 전륜(轉輪) 등의 명색(名色)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중원(中原) 창씨(倡氏)의 희연의(戱宴儀)와 같은 것이었는데, 범례(凡例)는 한결같이 홀기(笏記)를 따라서 조금도 차실(差失)이 없었으며 접대하는 즈음에 성의가 상당히 간곡하였습니다. 관백(關白)의 금년 나이는 48세인데 장차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할 것이라고 합니다. 1. 도주(島主)의 집 북쪽에 새로 큰 건물을 건립하였는데, 이름하여 동무광전(東武廣殿)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객관(客館)을 건립하였는데 매우 웅장하였으며, 5년 만에 공사를 끝맺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백성의 힘에 의존하였는데 2구(口)가 있는 집은 1구(口)는 부역(赴役)하고 1구(口)는 농사를 지었으며, 1구(口)인 집은 1구가 부역했는데, 아울러 아무런 고가(雇價)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나온 강호(江戶)의 관인(官人)은 일행(一行) 1백 59인이 바다를 건너왔는데, 데리고 온 1백 33인에게 날마다 제공하는 어채(魚菜)·시탄(柴炭)에 속하는 것을 전부 촌민(村民)에게 담당시켰지만 또한 본가(本價)를 계산하여 지급한 것이 없었으므로, 이것이 국법에서 나온 조처이기는 하지만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44면 |
□ 천하전여총도의 일본 영토
전세계 방위를 24방위로 나눈 것이고, 중앙에 고려가 있다.
스페인(일본)은 '축인방(丑寅方)에서 시작되어 손사방(巽巳方)에까지 뻗쳤으며' 는 북극에서 시작해 남극에 이르는 어마어마하게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의 기록
'세계를 나누어 가진 세 나라, 즉 일본, 중국, 인도 가운데 나에게 저항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으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 알 수 있다.

<출처 : 빛의 전사들 '조선왕조실록과 일본사에 스페인이 일본이라고 기록'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sGGcvgK2F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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