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Corea가 세상의 중심 중국이고 천자국이었다

예덕나무 2026. 9. 28. 15:49

고려(코리아)- "core가 세상의 중심 중국이고 천자국이었다는 9가지 증거'를 살펴보자.

 

 

1. 고려사 및 『고려의 세계지도』 관련 사료 조작의 근거

 

  ○ 일본어 신문 및 서적 출처

     1877년부터 1913년까지 도쿄 신문 기자로 활동한 우치다 지로의 기록과, 일본 역사학자 아베 노부요시가 1975년에 출간한 책 『고려의 세계 지도』가 그 근거이다.

    이 책은 2006년 민음사(번역: 고려대 동양사 교수 이경훈), 202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등을 통해 번역·출간되었다.


  ○ 고려사 목판본의 권수 글자 삭제

   『고려사』 수만 페이지 분량 중 '고려사 권 147'에 해당하는 목판본을 대조할 때, 똑같은 판본의 내용임에도 한쪽에는 '147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다른 쪽 판본에서는 '1'이라는 숫자가 들어갈 자리가 정확하게 파여 나가서 없어졌고 '47'만 남아 있다.

     이를 인간이 우연히 찾을 수 없는 증거이자, 누군가 고의로 조작(글자 파내기)한 명백한 물증이다.

     또한 종이가 저렇게 하얗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옛 서적은 색깔이 바래 누렇다.

     고려사 원본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하얀데, 간혹 색깔이 저렇게 누런 것이 나온다.

고려사 좌측은 147권 표기되었으나, 우측은 47만 표기되어 1백자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저 흰 종이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옛 서적이 저렇게 하얄 수가 없다.


  ○ 날짜 '미상' 처리

 

     고려사나 청나라 실록 등의 기록에서 11월 전체 혹은 월·일이 '날짜 미상'으로 처리된 점이다. 

     초등학생도 일기에 날짜를 쓰는데 역사책에 날짜가 미상인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다른 나라의 역사책과 서로 날짜를 꿰맞추는 과정에서 조작된 기록임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날짜를 비워둔 것이다.

 


2. '고려(Korea)'와 '코아(Core)'의 어원 및 천자국 사상


'Core(핵심)' 어원설: 영어에서 'Korea'를 '코레(Kore)'로 발음하는 점에 주목하여, 이 단어가 영어의 'Core(핵, 중심, 핵심부)'를 뜻한다.

즉, 우리 국명 자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천자국'임을 뜻한다.


  ○ 중국 신화 및 그리스 신화와의 융합 

     서경에 등장하는 치우천왕의 군호인 '구류(구루)'와, 그리스 신화 속 지옥의 여신이자 로마에서 '코레'로 불리는 '페르세포네(지옥 여신)'를 연결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지옥(사후세계·근원) 및 우주의 근본적인 중심지와 연관되어 있다.

 


3. 북두칠성, 윤놀이, '만자(卐)'에 담긴 우주 중심 사상


  ○ 북두칠성 민족

     사람이 죽으면 관뚜껑에 북두칠성을 새기고 '칠판'이라 부르는 전통을 근거로, 북두칠성을 '죽음의 별이자 중심의 별'이며, 우리 민족이 북두칠성 숭배 민족이다.

  ○ 윤놀이판과 28수, 만자(卐)의 구조
     전통 윤놀이판의 점 개수가 총 29개이며, 사방에 7개씩 배치된 점이 동서남북 28수(상징적 별자리)를 형성하고 가운데 점이 북극성을 뜻한다.

     불교의 '만자(卐)' 역시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삥 돌아가며 회전하는 우주의 중심 운동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모든 세계의 문명과 종교가 우리나라에서 퍼져 나갔다.

 


4. 고려 묘지명에 등장하는 '천자(天子)' 표현

1148년(의종 2) 최루백이 아내 염경애를 위해 지은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

1. 장례와 묘지의 기록

1146년 병인년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사람 최루백의 아내인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2월 임인일에는 서울 북쪽 박혈 서북쪽 언덕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서울 동쪽 청량사에 임시로 모셨다.
그리고 3년 뒤인 1148년 무진년 8월 17일에 인효원 동북쪽, 그녀의 아버지 묘 옆에 장사지냈다.
최루백이 그 무덤에 글을 지어 기록한다.


2. 염경애의 집안과 자녀

아내의 이름은 염경애(廉瓊愛)이다.
검교상서 우복야·대부소경을 지낸 염덕방(廉德方)의 딸이며,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 심씨였다.
그녀는 25세에 나에게 시집왔으며, 여섯 자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 단인(端仁)
둘째 아들 단의(端義)
셋째 아들 단례(端禮)
→ 세 아들은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다.
넷째 아들 단지(端智)
→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첫째 딸 귀강(貴姜)
→ 흥위위 녹사 최국보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둘째 딸 순강(順姜)
→ 당시 아직 어렸다.


3. 염경애의 성품

염경애는 사람됨이 영리하고 총명하며 신중하고 엄숙했다.
글자를 상당히 알고 큰 도리에도 밝았다.
말씨와 용모, 솜씨와 행실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시집오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도리를 부지런히 실천했다.
남편과 시부모의 뜻을 미리 헤아려 받들었으며,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
또한 친척들의 경사와 흉사, 혼례와 장례 등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훌륭하게 여겼다.


4. 남편을 따라 고생했던 23년

최루백은 자신이 지방관으로 나가 패주와 중원의 수령을 맡았을 때의 일을 회상한다.
내가 천 리 먼 길을 떠날 때에도 아내는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남편이 군사 업무에 종사할 때에는 아내가 추운 집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또 남편이 궁중의 일에 관여할 때에는 집안에 음식이 있든 없든 먹을 것을 마련하여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최루백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라 어려움과 고생을 함께한 23년의 일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5. 시아버지를 위한 제사

염경애는 남편의 아버지를 직접 섬길 기회는 없었지만, 해마다 명절과 복날·납일 같은 때가 되면 직접 제사를 올렸다.
또 직접 실을 잣고 길쌈하여 조금씩 모은 뒤,

옷 한 벌
또는 바지 한 벌을 직접 만들어 제삿날이면 영좌를 마련하고 절하며 바쳤다.

그리고 절에 가서 재를 올릴 때에는 사람이 많든 적든 버선을 만들어 승려들에게 보시했다.
최루백은 이것을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회고한다.


6. 염경애가 남편에게 했던 말

여기가 이 묘지명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염경애가 평소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책을 읽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세속적인 일에는 힘쓰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집안의 옷과 식량을 마련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구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혹시 내가 먼저 죽고, 훗날 당신이 높은 녹봉을 받으며 뜻하는 일이 모두 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나를 재주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말고 내가 집안의 가난을 막기 위해 애썼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7. 남편의 벼슬길을 기뻐한 아내

1145년 을축년 봄, 최루백이 사직(司直)에서 우정언·지제고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자 염경애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의 가난이 이제 거의 해결되겠군요.”

최루백이 대답했다.
“간관(諫官)은 녹봉을 지키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자 염경애가 말했다.

“만일 어느 날 당신이 궁궐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옳고 그름을 논쟁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으며 삼태기를 지고 생계를 꾸려야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달게 여기겠습니다.”

최루백은 이 말을 두고, “이는 평범한 부인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라고 평가한다.


8. 염경애의 죽음

그해 9월 염경애가 병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146년 병인년 정월에 병이 위독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최루백은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었겠는가.” 라고 애통해한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뒤에도 최루백의 관직은 계속 올라갔다.

1146년 여름 → 우사간
같은 해 겨울 → 좌사간
1147년 봄 → 시어사
1147년 겨울 → 예부원외랑으로 좌천
1148년 봄 → 예부낭중
이어서 → 청주부사

가 되었다.

관직이 올라가면서 녹봉도 많아졌지만, 최루백은 집안의 의식주를 돌아보면서 오히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애써 마련하던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그녀를 재주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아내는 죽기 직전 자신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자녀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맞고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염경애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이는 47세였다.


9. 마지막 명문(銘)

마지막 네 구절은 매우 유명합니다.

尋信誓 不敢忘
진실한 맹세를 되새기니, 그대를 감히 잊을 수 없구나.

未同穴 甚痛傷
아직 함께 한 무덤에 묻히지 못하니, 그 슬픔이 너무나 크구나.

有男女 如鴈行
아들과 딸들이 있어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으니,

期富貴 世熾昌
그들이 부귀를 이루어 대대로 번성하기를 기약하노라.


  ○ '염경애 묘지명' 실물 및 한문 구절

     고려 시대 비석(묘지명)에 새겨진 내용을 근거이다.

     정칠품 사직에서 정육품 우정(우정은 지제고)으로 승진한 '염경이'의 부부 대화 내용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 쟁론(爭論) 대목

     묘지명 내용 중 남편이 "간관은 녹이나 먹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하자, 아내(연경이)가 "당신이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옳고 그름을 쟁론하게 된다면…"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 해석

     신하가 목숨을 걸고 천자와 마주 서서 시비를 다투는 이 무대와 표현이 고려 왕실 기록에 명확히 '천자'로 써져 있으므로, 고려가 제후국이 아니라 천자가 직접 다스리던 명실상부한 천자국이었다는 증거이다.

 

 

5. 『신증동국여지승남』과 '도(道)' 개념의 왜곡

위 자료는 김종직(金宗直)이 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발문(跋文) 부분이다.
본문은 세로쓰기이므로 오른쪽 열부터 왼쪽으로 읽는다.
사진의 판면에는 ‘東國輿地勝覽’이 보이고 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후대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신증’ 부분이라기보다,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계통의 발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임원준 등 여러 사람이 처음에는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들의 이름 또한 인물조에 기록하였다. 
삭제한 것이 비록 한둘에 그치지 않았으나, 새로 증보한 내용은 실로 많았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하여 55권으로 만들었으며, 모두 8개월이 지나서야 마침내 완성하였다.

신(臣) 종직이 삼가 생각하건대, 중국의 땅은 비록 외진 지방의 작은 고을이라 하더라도 그림과 지리지(圖志)를 갖추지 않은 곳이 없다. 
진실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이미 완성된 책들이 있어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은 삼국시대 이래로 조정에조차 기록과 문헌이 부족한 형편이니, 하물며 지방의 군현이야 어떠하겠는가.

이번에 이 책이 완성된 것은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와 보고 들은 것들을 널리 채집한 결과이다. 
그 가운데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는 데에도 아직 완전히 마땅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한 나라의 영역 안에 있는 고금의 자취를 정리하여, 정밀하고 거친 것, 크고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책을 펼치면 한눈에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비록 감히 중국의 『일통지(一統志)』에 견줄 수는 없지만, 여러 지방의 지리서인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비교한다면 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으로써 온 나라의 여러 지방과 후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반드시 조금이나마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 12월 어느 날,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동지경연성균관사(同知經筵成均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 김종직은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려 삼가 발문을 쓴다.

 


  ○ 거대한 '도'의 규모

   『신증동국여지승남』의 한문 원본 및 동국문화사 영인본(1969년판 등)을 보면, 과거 기록에 경상도 등의 크기가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9년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총 6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색인책 하나가 더 있다. 하도 내용이 많아 색인책을 따로 만들었다.
경상도의 넓이는 2천리이요, 길이는 배가 된다. 도가 하나의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나라' 라는 표현을 사용해 실로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경상도의 그 길이가 4천리라고 했는데, 지도에 표시해 보면 한반도의 3배 정도가 된다.


  ○ 행정구역 단위의 모순

     남북한의 실제 지리적 길이는 2천리가 되지 않는데, 옛 기록의 '도'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영토(독자적인 나라 수준)였다.


  ○ 개성부와 10도의 분할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편)

     고려 성종 때 황도를 개성부로 고치고, 그 조그마한 개성부 안을 다시 10개의 도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대했던 영토 단위의 '도' 개념과, 수도 내부를 쪼갠 행정 구역으로서의 '도' 개념을 혼동하게 만들어 역사를 한반도 내로 좁게 조작했다.

적현(홍산)이 중국이고, 개성이며, 서울이었다. 또 전세계의 수도였다. 하나의 현으로 재했다. 여기서 10개의 도로 나누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와 나라개념인 경상도의 도는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역사왜곡이 되어 지금의 한반도 8도가 고착된 것이다.
붉은 색 표시가 개성부이며, 수도자치구이다. 여기를 10개도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여기 도의 개념은 작은 개념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등은 국, 나라 개념으로 큰 것이다.

 

6. '적현신주(赤縣神州)'와 서울(개성부)의 정체

중국(中國)을 이름하여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한다.
적현신주 안에도 본래 아홉 주(九州)가 있으니, 우(禹)가 차례로 정한 아홉 주가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州)의 수에 넣지 않는다.
중국 밖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아홉 개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구주(九州)이다.

① 중국(中國) = 적현신주(赤縣神州)

그리고 그 적현신주 내부에 다시 9개의 주(九州)가 있습니다.
② 적현신주 내부 → 우(禹)가 정한 9주
冀州 기주
兗州 연주
靑州 청주
徐州 서주
揚州 양주
荊州 형주
豫州 예주
梁州 양주
雍州 옹주

그런데 이 9주는 ‘중국 밖의 9개 적현신주’와는 별도로 계산
따라서 전체적인 세계관은
중국 = 적현신주 1개
→ 그 안에 9주가 있고,

중국 바깥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영역이 9개 
→ 이것을 합쳐 구주(九州)라고 부른다는 구조

[적봉현(赤峰縣)] : 
수당(隋唐) 시기에는 거란(契丹)의 영토였습니다. 

금나라(金代) 때는 북경로(北京路) 임황부(臨潢府) 및 중경고주(中京高州)의 땅이었습니다. 

원나라(元) 때는 대녕로(大寧路) 상도(上都) 두 로(路)에 속했습니다. 

명나라(明) 초기에는 대녕전위(大寧全衛) 두卫(衛)의 땅이었으나, 후에 兀良哈(우량하이)에 편입되었습니다. 

청나라(淸) 초기에는 내몽골(內蒙古) 팔기(八旗) 몽골 북경에 속했습니다. 

건륭(乾隆) 연간에 오한(烏蘭) 하달청(哈達廳)을 설치하였고, 나중에 승격시켜 적봉직예주(赤峰直隸州)로 개칭하였습니다. 

중화민국(民國) 시기에도 그대로 현(縣)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열하도(熱河道) 쑤허(熱河) 특별구역에 속해 있었으며, 현의 치소(治所)는 동북쪽 5리에 위치하고 있고 현의 이름은 이로 인해 유래했습니다.   

지형과 산업: 
토지는 승덕(承德) 지역보다 우수하며, 목축업과 농업이 매우 성대합니다. 
중화민국 3년(1914년)부터 상업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중국 고금지명대사전의 '적현': 중국에서 발행된 『중국 고금지명대사전』 등의 문헌에 "중국이라는 것은 적현신주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 적현 = 서울(개성부) 

     적현은 전 세계의 수도를 뜻하며, 고려 성종 때 황도를 개성부로 고치고 그 아래 기현(경기현)과 7개 현을 관장하게 한 기록이 있다.

  ○ 조선왕조실록의 번역 근거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등에서도 '적현'을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해 놓은 점을 근거로 들며, 진짜 적현(중국)이자 전 세계의 수도는 한반도 땅이 아니라 개성부/홍산 일대의 거대한 중심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적현(중국, 개성부, 서울) 표시를 증명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적현(홍산, 츠펑시, 적봉)이 중국이라는 증거임.
적현은 중국이며, 서울이다.
적현은 우리나라 중국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개기일식 기록을 정리하면 홍산이 수도가 된다.

 


7.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속 조선 영토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책 '임진란의 기록'에 나온 코리아의 지방 표시. 일개 도가 나라라는 표현이 여기도 나온다. 적국, 백국, 녹국, 자국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문이자, 작전 참모였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책 『일본사』의 대목을 보자.

  ○ 8개 도의 국가적 실체

     책에 "조선은 뚜렷하게 8개의 지방으로 나눠져 있으며, 이들은 색깔에 따라 적국, 백국, 녹국, 자국 등으로 불렸다"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 해석

     유럽 기록에서 조선의 각 '도(道)'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실제 독립된 '나라' 수준의 거대한 영토 규모와 체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측의 객관적 증거이다.

 

 

8. 14~15세기 '코리아 제국(Empire of Korea)' 고지도

이것은 수도자치구를 그린 지도이다.

 

원문:
CARTE DE LA PROVINCE de Leau-tong ou Lyau-tong et du ROYAUME DE KAO-LI ou CORÉED'après sur la Carte Anglaise

번역:
요동(Leau-tong 또는 Lyau-tong) 성과 고려(KAO-LI 또는 CORÉE) 왕국의 지도   영국 지도(Cartes anglaises)를 바탕으로 제작함

붉은 색 표시가 개성부이며, 수도자치구이다. 여기를 10개도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여기 도의 개념은 작은 개념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등은 국, 나라 개념으로 큰 것이다.

 

 

 

 

  ○ 프랑스 지도 제작자의 고지도

     프랑스 지도 제작자 니콜라스 벨렌 등이 제작한 1300년대의 세계 지도 자료가 있다.

  ○ 수도 자치구(Capital Autonomous Region)

     해당 지도에 전 세계가 '엠파이어 오브 코리아(코리아 제국)'로 표기되어 있으며, 수도 자치구(개성부/홍산)가 중앙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 몽골 제국의 재해석

     1300년대 몽골 제국이나 원나라의 실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무신정권이 전 세계를 쓸어버린 역사가 왜곡된 것이다.

 

9. 1895년 영국군 장교가 쓴 책의 표현

    임금은 1만개 섬의 주인이며, 하늘의 아들이고 표현이 나온다.

    한반도 섬이 3,000개, 일본은 6,700개 있다. 대만이 20개 있다.

    이 세군대 땅을 다 합해야 10,000개가 된다.

    또, 하늘의 아들 천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 섬이 3,000개, 일본은 6,700개 있다. 대만이 20개 있다. 이 세군대 땅을 다 합해야 10,000개가 된다.
1895년 서울에서의 기록이다.


9.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중국'의 의미

 

  ○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구절 :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 해례본 내 중국의 정의

     해례본의 해석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인즉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 해석

     한자나 언어의 주인이 중국(명나라)이라는 기존 통념과 달리, 언어와 문화, 황제가 존재하는 진정한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인 '중국'의 실체는 바로 우리 나라 자체였다는 점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료다.

 

이 지도에서 24방위표를 상단 중앙에 그리고, 중심선이 수도자치구 한반도를 지나간다.

이것만 봐도 전세계의 수도가 한반도 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빛의 전사들 'core가 세상의 중심 중국이고 천자국이었다는9가지 증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3EffrAjOSRI&t=89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