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전생에서 공부했던 모든 것들을 알게 된다.
사람이 많은 세월을 통해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전생 경험을 일순간 보게 됨으로써,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마음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태초에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아가게 되는 과정이며,
수련자가 수련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이정표와 같은 과정이다.
있다 없다의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련자는 수련과정 중에 전생을 확연히 눈으로 보게 되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먼저 가봤으니까 후학들이 그대로 뒤따라와서 그 길을 직접 가서 보고,
자기 수련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할 뿐이다.
자신의 전생을 보면 타인의 전생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수련자가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자신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가령 호흡수련을 하는 회원들은 몸이 어디가 안 좋거나 집안이 뒤숭숭하거나,
혹은 마음에 모순된 구석이 있다면 왜 그런지 그 원인을 찾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면 전생에서 기인된 것들이 있곤 하다.
그래서 전생이 이러이러하다고 알려 주게 되면,
본인은 전생을 모른다 하더라도 듣는 것만으로
뇌세포에 기억되어 있는 전생이 떠올라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본인이 전생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깨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서 편협했던 마음, 잘못된 습관 등이 바뀌게 된다.
일반인들도 전생이 있다 없다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전생은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떠한 쪽에 소질이 있다면, 그 소질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부모가 가지지 않은 남다른 소질이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구는 공을 잘 차고, 누구는 피아노를 잘 치고...
무언가 똑같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남들보다 월등히 잘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전 언젠가 해보았기 때문에 지금은 쉬운 것이다.
그래서 도를 지도할 때는 전생에 했던 부분으로 많이 유도를 해주고,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해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굵직한 기억 이외에 전생은 현실적으로도 밀접한 영향을 끼치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생영이다.
전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바로 앞의 전생이 있다면, 그 이전의 전생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전생 중에서 어느 전생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이것이 나의 운이 된다.
예를 들어 전생에 학자였던 영이 있고, 놀기 좋아하는 영이 있다고 하자.
이 중에 놀기 좋아하는 영이 지금 나에게 붙어서 10년간 따라다니는 운이라면,
나는 계속 놀기만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전생에 학자였던 영이 3년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운이라면,
그때부터는 계속 책만 보게 된다. 공부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전생은 일생운 과도 연관이 있다.
따라서 사람의 성격이란 것은 일생동안 똑같은 것이 아니다.
기복이 있어서 어느 시기에 가면 바뀌게 된다.
불같이 욱하던 성격이 어느날 갑자기 성인군자처럼 되고,
양순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망나니가 되기도 한다.
즉 전생영이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다음에 올 전생영 등이 살아가는 운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운대로 그냥 흘러가게 된다.
이럴 때 장점만 갖추게 되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학자인 전생영이 붙어 있다가
일년 후에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바뀐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 학자의 고집은 뜻을 이루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쓰게 되고,
한량의 여유로움은 평상시 대인관계에 잘 활용하면 좋다.
만약 수련을 통해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좋고 나쁜 것이 다 기본 바탕으로 형성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전생영의 성격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소년들이 공부만 한다는 것과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좋아한다는 것을 탓할 수 없는 문제다.
만약에 전생에 놀기 좋아했던 영이 하필이면 고등학교 시기에 붙어 버렸다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다.
놀러 다니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그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 시기에 학자영이 붙는다면 다른 것이 재미없고,
공부하는 것만 재미가 있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를 탓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등학교 때에 공부를 잘해야 운이 풀리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즉 본질적으로 탓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악운으로 작용하는 경우라 하겠다.
그래서 전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만큼 많은 득이 되는 것이다.
내가 전생에 어떤 것을 하면서 어떤 한을 품고 살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한이 풀어져 버린다.
내가 전생에 편협한 이런 안좋은 면이 있었으니,
이젠 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성격이 일취월장 바뀌게 되는 것이다.
좁쌀 같은 마음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전생을 아는 것이 의미가 있다.
전생은 현생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이 동물로 환생할 수 있나?
사람들이 '나는 전생에 소였다', '나는 곰이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욕을 하는 행위와 같다.
사람은 곰이 될 수 없고, 곰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곰은 새끼를 낳아도 곰 새끼를 낳고,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사람을 낳는다.
원숭이가 사람을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법도다.
모든 것이 법도에 어긋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생에 소였다, 돼지였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감정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거짓말하기를 좋아해서 이야기를 꾸며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상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라는 건 전생에서 현생, 내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엔 하나의 제도가 있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도둑질을 했다면, 법원에 가서 판사들에게 판결을 받게 된다.
징역이 선고되고 나면 가는 곳이 바로 교도소다.
교도소에 가면 계속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감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죽으면 도계로 가게 된다.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영계도 그중 한부분이다.
그곳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죄와 벌을 가리기 시작하는데,
죄 지은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제도로 만들어 놓은 형벌이 있다.
즉 나중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 한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기회란 지상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며, 깨우칠 수 있는 기회다.
이 때의 영은 빛이다. 모든 만물은 빛으로 되어 있다.
빛의 층에 따라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데, 영도 빛이기 때문에 주변 물건들,
예를 들어 방석, 병 같은 곳에도 집어넣어 가둘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동물 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다.
곰이나 멧돼지 속에 집어넣으면 동물처럼 살아가면서 고행을 하게 된다.
즉 감옥 이동을 하는 것이다.
동물이 바로 감옥 역할을 하게 된다.
감옥이동을 하는 순서를 보면,
뱀 같은 야생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가축으로 오게 된다.
소, 닭, 돼지 같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보시하고 나서,
도계나 영계로 올라간 다음 다시 사람으로 환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도살장에 가서 보면,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동물이나,
눈동자에서 마치 사람과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동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그 마지막 순간에 갖혀 있던 영이 나가면서 느끼는 그 감정이 동물의 눈에 비추어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가끔 길을 가다가 동물들을 보면,
그 안에 조선시대 사람부터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형량이 얼마 남았는지를 유심히 살펴 보면, 역으로 그 동물의 남은 수명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죄를 짓고 죽었다고 해서 동물로 환생하여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자신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사람의 영이 일시적으로 동물의 몸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것과 동물이라는 감옥으로 잠시 들어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 전생의 의의는 무엇인가?
전생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꼭 필요한 과정일까?
그렇다. 내가 전생에 60년을 살았다면,
전생을 알게 됨으로써 60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60년을 살아야 깨우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 30세라면 그 사람은 90세의 정신과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것을 많은 학문을 깨우치는데 원동력이 되며, 좋은 인격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전생의 그런 일을 모른다면,
욱하는 성격에 기분나쁘다고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가 있다.
수련자가 자신의 전생을 볼 때는 눈물도 많이 흘린다.
전생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잃어버렸던 과거와 전생을 알게 되면서 눈물로 한을 씻어 내리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이생까지 살아왔구나...' 를 알고 나면,
60평생 전생이 바로 어제의 일이 된다.
이렇게 전생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교육을 실질적으로 많이 체험을 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여유롭고 너그럽게 쓰는 데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흔히 사람들이 농담으로 '나는 전생에 왕이었나봐, 공주였을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전생에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내가 전생에 왕이었는데, 현생에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전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전생을 보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많이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깨우치게 됨으로써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왕이었다고 해서 교만해질 사람은 거의 드물다.
왜냐하면, 스스로 본인의 전생을 확연히 알 정도가 되면,
당연히 현실과 과거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주위를 보면 전생이라는 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전생을 빙자해서 결혼을 하는 등의 행위이다.
전생에 우리가 부부였으니 결혼해야 한다는 말은 총각이라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멋진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인이 있는 사람이 전생을 빙자하여 현생의 부인과 이혼하고,
젊고 어여쁜 여자와 다시 결혼을 한다면, 이건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그야말로 전생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전생은 그저 전생일 뿐이다.
전생에 왕이었으면 무얼 하겠는가?
현생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은 자기에게 이롭게 깨달음을 얻는 도구에 불과하다.
전생을 보고 난후 전생의 고난을 그대로 쥐고,
현생의 자기와 안좋게 비교해서 살아가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때문에 우연한 계기로 전생을 알게 되는 경우와,
본인이 직접 선도수련을 통해 스스로 전생을 안다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복숭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숭아가 맛이 있다며 그림을 보여 주는 것과,
직접 먹어보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수련을 통해 전생을 아는 것만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간혹 회원들 중에서 전생을 알고 싶어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도장에서는 도움이 될 전생을 이야기할 뿐이지,
해가 될 전생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 공부하는 사람의 전생이 왕이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때론 당신은 거지였다고 거짓말도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공부를 꾸준히 해서 스스로 전생을 볼때가 되면,
그땐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선도인들의 세계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더더욱 전생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만큼 정신적으로 빈곤이 나타나고,
그 빈곤을 메우기 위해 정신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한다.
지금 같은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까?
세상이 좋아지니까 삶의 욕심도 커지는 것이다.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아간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그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노인들을 보면 삶의 즐거움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늘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의 노인들은 그런 이야길 하지 않는다.
'이 좋은 세상에 왜 죽느냐'고 한다.
현대 사회는 그만큼 문명이 발달해 살기 편하고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적인 면, 장수하는 쪽으로 관심이 쏠리고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전생이 있다면 내생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결국으느 내생이 궁금해서 전생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전생이 있다면, 내생도 있기에 삶의 위안을 거기서 삼게 된다.
호기심은 호기심대로 늘어만 가고...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전생을 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저렇게 방황을 하는 것일까?
전생은 하나의 정신적인 기운이다.
시간대로 치면 과거에 있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은 우주공간에 널려 있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정보가 저장되어 있듯이,
우주공간의 별들이 하드디스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삶들이 우주공간의 별들에, 운석들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입력되어 있다.
그걸 꺼내 보면 된다.
컴퓨터를 구동시켜서 하드디스크 속의 정보를 꺼내 보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워가 있어야 한다.
내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힘의 에너지는 바로 빛이다.
그 빛이 물질화 되면 색이고, 그 색이 유형화하여 감각화하는 것이 기다.
일단 기를 터득해 단전에 기가 쌓이고,
그 기가 색과 빛으로 화하는 단계에 가서 정신이 밝아지게 되면 내 몸에 엄청난 파워가 생긴다.
분위기라는 말이 있다.
나눌 분分자를 써보자.
기가 나뉘어지는 것이 분위기이고 그것이 운기다.
경락을 뚫는 운기.
이것이 능수능란해지면 우주의 에너지도 내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조절할 수가 있다.
그때에 자기의 전생과 내생도 보고 다른 이의 운명과 숙명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법을 찾지 않고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한다.
노력없이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전생에 관심이 있고, 참으로 전생을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호흡을 조금 더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길이 있다.
전생은 자신의 것이다.
자신 것을 보아야 남의 것도 보인다.
자기 전생을 알려면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해야 한다.
남하고 비교할게 못된다.
전생은 이처럼 종교를 떠나서 자신, 가족, 사회를 밝아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전생에 했던 나쁜 습관의 해독을 알아 현생에 적용하게 되면 주위가 밝아진다.
전생을 안다는 것은 또다른 자기 내면을 아는 것이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수련을 해야 한다.
기도하거나 빈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꿈에 나오기도 하고, 최면을 통해 끄집에낼 수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이다.
자유롭게 전생을 보려면 어느 경지까지는 가야 한다.
그 경지까지 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군자같은 사람들이다.
전생에 관심이 있는 많은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전생을 생각할 때,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써
전생을 잘 알아 스스로 진실로 살찌우고자 했으면 하는 것이다.
선도수련을 통해 도인의 길을 걸으며, 그 과정속에서 자신을 찾기 바란다.
그 간단한 것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전생이 있다 없다를 논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고 무익한 일이다.
◆ 전생에 관한 부연설명
흔히들 갖는 의문 중에 전생과 인구를 연관시켜 트집을 잡는 이들이 있다.
즉 전생이 있다면 인구의 증가는 어떻게 가능하냐는 이야기다.
물론 인구는 늘어 왔지만, 어는 정도 이상되면 인구는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인간의 수도 하늘에서 조절을 한다.
지구권에 맞는 영의 수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 인구가 50억이 있다면 천상에도 30~40억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이 계속 순환함으로써 인구는 어는 한도 이상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나 전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이 없는 이들도 꽤 많다.
사람 몸을 특별한 이유에서 처음 받고 내려온 경우엔 전생이 없다.
언젠가 전생과 관련된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부연설명 하는 김에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보통 죽어서 다시 환생하기까지는 300~400년이 지나야 한다.
최대한 빨리 오는 경우라도 100년 이내에 환생하는 일은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죽은 아버지가 자식으로 환생한다거나,
죽은 애인이 주변 인물로 다시 태어나거나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도시속 신선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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