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삶 영계

마음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예덕나무 2026. 2. 24. 08:45

 

 

<마음이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원신(자신의 근원적인 빛)보다도 이전의 근원적인 빛(우주의 기원에서 말한 빛)이 바로 마음이다.

이 마음은 아쉽게도 도통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역설적으로 마음을 모르기에 오히려 공부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알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럼 단순해 보이는 호흡수련을 통해 '마음도 닦여진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하단전에 있다.
이 근원적인 마음을 우리의 의식과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하단전의 정인 것이다.

 
하단전의 정이란 무엇인가?
석문호흡을 통해 기를 모은다는 자체가 하단전의 정을 기로 승화시키는 작용에서 시작된다.
즉 호흡수련을 통해 우리의 한 호흡이 우주의 근원적인 빛, 마음의 본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구태여 마음이 무엇인지 끙끙 앓고 고민하지 않아도 석문호흡을 통해 마음공부가 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마음(원신보다도 근원적인 빛)과 호흡수련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분들은 이즈음에서 바로 앞장의 원신과 여의주의 관계를 떠올려 보시라!

아하 그런 건가?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것이다.

나 자신의 근원적인 빛이 원신이다.
그 원신은 하단전을 통해 현생의 나와 연결된다.

그 원신보다 더 근원적인 빛이 바로 마음인 것인데, 
그 마음이 바로 하단전의 정을 통해 우리의 의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근원적인 빛으로서의 마음! 이 마음에는 한계가 없다.
물질계가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지상에는 한계가 있다.

왜 한계가 있는가?
바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음만 비우고 깨우치면 뭐든지 된다고들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마음만 가지고 모든 것이 된다면 나는 밥먹었다 생각하면 배불러야 하고,
내일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육신을 가진 한계이다.

신명들은 한계가 없다.

육신을 가지고 지상에 있기에 한계가 있는 거고,
그 한계를 통해 좌절하고 고민하면서 근원적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무고무도無苦無道가 되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마음의 상태로는 공부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거 다 되는데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문제가 안풀리고 막히니까 그걸 풀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가지고 내려와 공부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뭐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그런다고 마음이 알아지는게 아니다.

직접 수련을 통해 근원적인 빛까지 올라가 도통을 해야 비로소 마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단전의 정, 그것이 마음을 닦는 열쇠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마음을 비운다고 마음공부가 되는가?
마음을 비우려면, 마음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다, 채운다 하기 전에 먼저 수련을 통해 정을 닦고,
도계입문을 해서 도통을 해야 마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선도에서 말하는 도통이라는 것과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수련체계에 있어서의 깨달음과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라 하겠다.

"죽으면 자기가 잘못했던 것, 잘했던 것에 대한 깨달음은 있다. 이것은 깨달음일 뿐이다.

육신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와야만 도통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1천영계(지상계, 조상계)에 있는 사람이, 사람이 아닌 영의 상태로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1천영계 내에서의 공부(깨달음)는 얻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2천영계, 3천도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천완성계까지 가려면 결국 사람의 몸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와야 한다.

이처럼 깨달음이란 것과 도를 이룬다는 것은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TV를 보고 채널을 바꿀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TV가 고장나도 고칠 수 있는 경지가 도통이다.

영계에서는 깨달음은 있다.
그러나 도통은 육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영계에서도 도통할 수 있다면 굳이 육신을 가지고 내려올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육신이 있어야 도를 이룰 수 있기에 육신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이처럼 영의 세계에서는 각은 있으나 도는 없다.

1천계에서 2천계로 올라가려면 사람으로 내려와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원신보다도 우선시하는 근원적인 빛이라고 한다면,
결국 마음공부라는 것은 도통을 위한 공부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근원적인 마음이 현상계에 작용하는 열쇠가 바로 하단전의 정에 있다면,
우리가 마음을 진정으로 알기 위한 방법 또한 하단전에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단전이란 육신이 있는 상태에서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결국 근원적인 빛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육신을 가지고 호흡수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호흡수련을 말이다.

단지 석문호흡 수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상스런 훈련이나 모임같은 것을 갖지 않고도) 심적인 수많은 변화와 소위 수심기간(마음을 닦는 기간, 닦아지는 기간)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이 석문호흡 수련과 마음과의 연관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리라.

기력이란 말 그대로 기력일 뿐이다.

아무리 기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공부가 불가능하다.

물론 기수련을 통해 마음공부도 분명 가능하긴 하지만, 그 역시 엄밀하게 말해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마음공부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고'이다.

이 때문에 '무고무도無苦無道'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랴?

이 고통 자체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공부시키기 위해 만든 환경이라는 것을...

 


<도시 속 신선 이야기2 중에서>



 


<마음이란?>

마음의 실체는, 개별적·심리적 감정의 모임이 아니라,
하늘(근원)의 빛이 숨을 통해 인간 안에서 드러난 근본 마음,
즉 ‘하늘의 마음의 빛’으로 이해된다.​


기본 관점
○ 호흡, 특히 단전(석문)에서 이루어지는 숨을 통해 하늘의 근본 마음(빛)이 인간의 마음(빛)과 연결된다.​

○  숨(息) 자를 “자신 스스로(自) + 마음(心)”의 결합으로 보고, 
    숨 자체가 하늘의 마음이 자기 마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이치를 드러낸다.


마음의 실체​
마음의 실체는 단순한 생각·감정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근본 마음의 빛이 개인 안에서 작용하는 ‘심법(心法)’의 근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수많은 감정·생각의 움직임을 따라가
그 근원에 있는 최초의 마음, 곧 하늘의 마음·빛을 역으로 찾아가는 과정이다.​


심법과 마음 쓰는 법
석문호흡 수련은 “심법을 터득해 가는 과정”으로 정의되며,
심법은 하늘의 근본 마음의 빛을 창조적으로 쓰는 법이다.​

여기서 마음의 실체는, 방향성과 목적성을 가진 빛의 의지로서,
올바른 목적·목표·방향을 세우는 핵심 열쇠다.


무심 · 여의의 경지

다양한 마음과 감정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온전한 조화를 이루면 ‘무심’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고, 그 무심을 자유자재로 하면 ‘여의(如意)’의 경지에 이른다.​

이때의 무심은 감정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근본 마음의 빛에서 어긋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며,
이것이 마음의 실체가 드러난 상태로 이해된다.


사랑과 마음의 방향성​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 개체의지가 하늘의 밝은 빛을 향해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따라서 마음의 실체는, 결국 하늘에서 비롯된 빛으로 돌아가려는 근본 의지이자,
그 빛과 하나 되려는 본래의 마음으로 규정된다.​    

 

 

 


<마음과 생각 - 1>

마음이라는 것을 동양학적으로 말하면 장부에 배당시킬 수가 있다.

마음은 하늘에 있다.

도계(천상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거나 채우지를 못하는 것이다.
결국 도계(천상계)를 가야 마음의 실체를 보고 알아
마음을 비우거나 채우거나 자유자재로 다스리며 운용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지상에 있는 사람에게 작용하는데,
정신과 뇌에 작용하면 상단전에 있게 되고,
오욕칠정에 머무르면 중단전에 있게 되며,
몸에 머무르게 되면 하단전 석문에 있게 된다.

또 육장육부로 보면 심장에 있게 되고, 몸 안에 있으면 전신 혈맥에 다 존재하며,
배고플 땐 비위에... 소변볼 땐 신방광에... 호흡할땐 폐에...
분노할 땐 간에... 등등 쪼개어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쪼개어 가다 보면 치료의 방법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은 도계(천상계)에 있지만,
이것이 작용할 때는 천지와 천지간에 작용 안하는 곳이 없다.

즉 여인을 사랑하면 마음이 여인에게 가고,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에게 마음이 간다.

한마디로 마음을 몸안에 두면 몸 안에 있고, 몸 밖에 두면 천지간에 있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 - 2>

생각(살生, 깨달을覺)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깨달으라는 뜻이다.

살면서 많은 걸 깨닫게 되는데 과연 무엇을 깨달을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마음과 같은 것인데,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머물렀을 때 차분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 넓고 푸른 바다에 파도칠 때 찰나에 일어나는 하얀 거품처럼...
맑은 거품처럼 마음에서 좋은 생각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이 주위를 밝게 한다.

주위가 밝으면 세상이 밝아지고 나아가서는 우주가 밝아진다.





<마음이란?>

마음의 세계에는 나눈다면 8만 4천가지의 세계요...

모르면 1의 세계다.

다시 말하면, 흩으면 8만 4천이요, 모으면 하나다.

마음도 빛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빛의 세계를 모르고 마음을 논하는 것은
수영 못하는 자가 수영을 이론으로 아는 것에 불과하다.

선도는 체험이 중요하여 머리로 알아서는 안된다.

의념의 세계, 복잡한 뇌의 구조, 심오한 철학, 사상 등도 
단지 분석하고 분류하여 머리로 아는 것은 학자나 지식인들이 할 일이지, 
수도자가 할 일은 못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마음의 실체를 알면 마음 하나로 능히 삼라만상을 알고, 나누어 8만 4천가지로 쓰고, 
천지에 흩어진 마음 8만 4천가지를 하나로 모아 가볍게 하여 쓴다.

이것이 마음을 쓰는 법으로, 도화제의 심법은 마음을 아는 법이 아니라,
마음의 실체를 보고 그걸 바탕으로
마음을 쓰는 법을 우리가 마땅한 말이 없어서 심법이라 부른다.

도화제의 심법은 도법이다.
도법은 하나요, 열이다.
그래서 도는 열하나다.

열하나는 11이고, 11은 처음과 끝이다.

처음과 끝을 다 포함하니,
굳이 심법의 가지를 정리하면, 전 경락이 12 대심법이요,
360혈이 360 소심법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천심법이요, 땅에 있는 것은 지심법이요,
사람에게 있는 것은 정이다.

사람에겐 정이 있어야 심법이 밝아진다.

심법을 글이나 학문으로 논하려 하면 참법을 알지 못한다.
학문이 아닌 마음으로 마음을 아는 것이 제대로 알 수 있는 심법이다.

그래서 심법을 익히기란 어렵다.

유일한 심법을 터득하는 길은 자기 마음을 먼저 알아야 심법을 터득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하다.

자기의 마음을 아는 길이 빛의 세계를 아는 거고, 빛의 세계를 알려면 선도를 해야 한다.

<석문도담 중에서>
 

 

 


<심즉기행心即氣行>

마음이라는 것은 도계에 있지만,
이것이 작용할 때는 천지와 천지간에 작용 안하는 곳이 없다.

즉 여인을 사랑하면 마음이 여인에게 가고,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에게 마음이 간다.

한마디로 마음을 몸 안에 두면 몸 안에 있고, 몸 밖에 두면 천지간에 있는 것이다.

'심즉기행' 이라고 마음 가는 곳에 기도 간다는 의미인데, 
이 의미는 기를 알아야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를 잘 알면 빛을 보고 알게 되고, 빛을 알면 양신을 이루게 되며, 양신을 이루면 도계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도계에 가면 그 많은 것들 중에 마음의 실체를 보고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실체를 알면 지상에서 작용하는 원리나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