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조선의 한양(LA)은 운하도시였다

예덕나무 2026. 4. 7. 17:55

나성(라성)을 축조한 기록도 나온다.

북미 LA 라와 라성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운하를 팠다는 기록이 아주 많이 나온다.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운하이다.

이 운하는 한양(LA)에 엄청 많았다.

 

예전에는 LA 전체가 운하 도시였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걸쳐 그 운하들을 메우는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1920년대 말, 왜 운하를 메웠을까?
192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자동차의 보급

    1920년대 미국은 자동차의 시대였다.

    곤돌라가 다니는 운하보다는 자동차가 다닐 도로가 훨씬 절실해짐
  2. 위생 문제

     흐르지 않고 고인 운하의 물이 오염되면서 악취가 심해졌고,

     모기가 들끓는 등 보건 문제가 발생했음
  3. 행정 통합

     1925년 베니스 시가 LA 시에 합병되면서,

     LA 시정부는 관리하기 까다로운 운하를 없애고 현대적인 도로 시스템을 깔길 원했음

운하의 소멸 (1929년~1930년대)
1929년 7월부터 본격적인 매립 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운하가 흙으로 덮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일반 도로(Venice Blvd, Abbot Kinney Blvd 등)로 변했다.
이때의 공사로 과거 화려했던 "물의 도시" 모습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운하들
다행히 모든 운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베니스 운하 역사지구(Venice Canals Historic District)'라고 불리는

작은 구역에 몇 개의 운하가 보존되어 있다.

1990년대에 재정비를 거쳐

지금은 LA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주거지 중 하나로 꼽힌다.

 

운하를 팠던 기록이 아주 많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보면 '한강에 나가 마중하였다'고 나온다.

현재 경복궁은 한강과 6~7km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양 LA는 궁궐이 바로 한강 옆에 붙어 있어서 배에 내려 궁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 경복궁과 한양LA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인조실록을 보면 '한강에 나가 유람하고서 동호를 거쳐 동대문을 통하여 관소로 들어갔는데'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반도 동대문 쪽에는 호수가 없다.

 

세조 3년 6월 7일 기록에 보면

배를 타고 한강에서 유람하고 나서

'배를 같이 타고 천천히 노를 저어서 내려와 용산여울 아래 이르렀다'고 나온다.

궁궐 앞 한강에서 배를 타고 용산에 갔다는 이야기다.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록이다.

 

또 한강가에서 송별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한반도 경복궁은 한강과 멀리 떨어져 있어 이런 행위가 불가능하다.

한양 LA는 궁궐 옆에 바로 한강이 있었기 때문에 런 송별식도 가능했다.

 

경회루에서 연회를 하며 군사 경연을 한 기록이 있다.

한반도 경복궁 경회루에는 이런 군사 경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이런 경연은 아주 넓은 평지가 있어야 된다.

한양 LA에선 땅이 넓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태종 13년 2월 10일 기록에 

'남지의 아래에 운하를 열으니, 길이가 2천 2백 90척, 너비가 1백 30척이었다'고 나온다.

엄청난 크기의 운하를 팠다는 기록이다.

이 운하도 한반도엔 없는 것이다.

 

아래 지도에 거대한 저수지가 보인다.

이 저수지가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된 조성된 저수지로 판단된다.

 

 

임금이 신하를 나무란다.

'배가 다니고 통하는 여부를 어찌하여 듣지 못했다고 하는가? 살피지 못하였다고 대답함은 모두 망령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운하를 열고 배를 운행하였던 것이다.

 

운하를 파야 하는데, '우리나라 땅은 모두 사석이므로 물이 머물러 있지 않으니'라고 나온다.

한반도 서울은 전혀 사석이 아니다

지명이 아닌 지질을 봐야 한다.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한양(LA)는 사석(모래땅)이다.

이 묘사가 정확히 한양(LA)를 가르킨다.

 

태종이 경회루에서 운하 공사를 논의한 이유는,

경회루 자체가 거대한 수계와 연결된 조선제국 물류의 핵심 거점이었던 것이다.

즉 경회루가 운하 컨트롤 타워였다.

 

실록에서 신하들은 운하 공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큰 가뭄이 해마다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변호하지만,

역설적으로 매년 가뭄을 걱정해야 하는 기후 조건임을 시인하고 있다.

LA는 대표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철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건기가 매년 반복된다.

이는 한반도 여름 장마와는 정반대 현상이다.

'빗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는 운하의 수량을 유지하기 위해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며, 이는 수량이 불규칙한 LA리버 수계의 역사적 특징과 일치한다.

 

1만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운하를 파는 것은 일개 반도 국가의 규모를 넘어선 대륙 제국의 스케일이다.

LA의 거대 습지 지역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바위를 뚫어 도성까지 길을 냈다는 기록은 이 광활한 LA 분지를 제국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이다.

 

1612년 지도를 보면 좌측 중간쯤 네바다가 보이고 태평양으로 수로가 나있다.

LA는 이 수로 아래에 있었다.

큰 바다가 있고 그 우측으로 운하가 있는데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대규모 운하로 보인다.

남경(아시아)에서 북경(덴버)까지 물자가 운하를 통해 LA(한양)에 도착하면,

대륙의 운하를 타고 조선제국의 심장 북경까지 흐르게 되는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조선과 명나라 간에 전쟁이 없었다. 

 

태종이 운하 공사때 큰 산이 있고,

두 읍 사이의 지점을 시찰을 가는데 그곳의 운하는 수로의 운하 공사를 말 하는 것이 아니고,

록키산맥을 뚫어서 명나라 수도인 덴버로 연결하는 운하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선의 수도 한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쇼'에 의해 조작된 결과다.

실제 조선의 수도 한양은 현재 미국의 LA였으며, 그곳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 운하도시였다.

 

 

핵심 증거는 아래와 같다.

 

물리적 흔적: 현재 LA 지역에 남아있는 정교한 수로와 운하의 흔적은 자연 지형이 아니다.

이는 태종(영락제)이 로키산맥을 관통하여 댄버(북경)와 오대호로 물길을 잇기 위해

건설한 천자국의 핵심 토목 유산이다.

좌측에서 운하를 뚫고, 우측에서도 뚫고 와서 북경에서 만난다.

이것을 보면 조선 태종이 명나라 영락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정호의 수선전도: 김정호가 그린 서울의 지도는 사실 나성(LA)의 정밀 수로 설계도이다.

지도 속의 촘촘한 물길은 함대가 도심 깊숙이 진입할 수 있었던 운하도시의 모습을 증명한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과 겹쳐져서 조작된 지도이다.

 

나성(羅城)과의 연락: 일제강점기까지도 우리는 우리의 진짜 수도인 나성(LA)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다.

노래 '나성에 가면'은 단순히 먼 미국 땅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아니라,

실제 우리 강역이었던 나성과의 소식을 묻던 민족의 기억이 담긴 곡이다.

 

이 지도는 당시 북미 아랫부분이 남극의 물이 녹아 땅이 많이 잠겨 있다.
영토가 지금보다 많이 적다.
우측 상단의 부분이 오대호 부분이다.
오대호쪽 바다에서 시작한 강줄기가 서쪽으로 흐르는데, 네바다(내륙의 바다)를 거쳐 바다로 이어지는 운하는 태종때 건설한 것이다.
운하 건설은 산을 관통하는 것이었기에 아주 힘든 공사였다.

 

제작 연도: 1612년 (출판은 1613년 그의 저서 'Les Voyages'의 부록으로 이루어짐) 제작자: 사뮈엘 드 샤플랭 (Samuel de Champlain, 1567~1635) 지역: 오늘날의 캐나다 동부(퀘벡, 온타리오)와 미국 북동부 해안 지역을 포함하는 '뉴프랑스' 영토

 

 

운하를 만들어 전국에서 보낸 조세를 운반하게 된다.

아래는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기록이다.

'7월의 바람을 피해 4~5월에 조운을 해보아라. 운하 한두 곳을 시험 가동해 보라'고 한다.

기록에 영길도라는 생소한 지역이 나온다. 이것이 영국이 아닐까 한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9월 21일 기록을 보면 

유사눌(柳思訥)이 대답하였다.
"운하[渠]를 파는 것이 바다에 너무 가까우면 조수(潮水)가 침입할 것이요, 육지(陸地)에 파면 공역(功役)이 클 것입니다.
임금이,

"중국에서 운하[渠]로 조운(漕運)하는 것이 건강(建康)에서 북경(北京)에까지 달한다. 만약 뜻을 두고 판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느냐?"

하니,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이,

"본국의 토성(土性)은 성기고 푸석하여 중국과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조선(漕船)이 패몰(敗沒)하여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바다에 인접한 LA리버 하류는 밀물 때 바닷물이 역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육지에 파면 공역이 크다'라는 것은 엘리시안 파크(북악산)와

그 주변의 단단한 지반을 뚫는 작업이 얼마나 거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태종과 영락제의 시간적 유사성을 비교해 보았다.

운하 건설도 아주 비슷한 시기에 했다.

천도의 시기가 너무 유사하다.

운하 건설의 대역사는 조선과 조선황제의 나라 명나라가 함께 했었다고 판단된다.

 

 

태종이 운하를 파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태종은 운하를 파고 싶은데, 이숙번은 농사 짓는 시기에 운하를 판다는 것이 못마땅해 했다.

 

태종은 운하를 파고 싶은데, 이숙번은 농사 짓는 시기에 운하를 판다는 것이 못마땅해 했다.

 

 

아래 기록은 명나라와 조선이 하나라는 결정적 증거 자료이다.

태종(영락제)와 세종의 부자분할 경영을 확정짓는 실체적인 증거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채백(비단)의 묘사와 선부(태종)의 충성에 대한 언급은 단순한 외교 수사를 넘어 북경(덴버)과 물류 허브인 한양(LA)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증거한다.

 

"영락 21년 8월 18일에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신 해수와 진경 등이 칙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장남인 이향을 세자로 삼아 정식 후계자로 승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화은 2천 냥과 형형색색의 비단 수천 필을 선물로 내려주셨습니다.

저와 조선의 모든 백성은 이 벅찬 감격을 가눌 길이 없어 삼가 감사의 표문을 올립니다. 사신이 방금 도착하여 황제 폐하의 귀한 말씀을 선포하시니, 그 은혜로운 혜택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 오직 감격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제 몸을 돌아보며 스스로 축하해 보아도, 이 은혜는 제 뼈가 가루가 된다 한들 다 갚기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생각건대, 저는 보잘것없는 재질을 가졌음에도 운 좋게 태평성대를 만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영토를 물려받았습니다. 늘 천자이신 황제 폐하의 덕화에 귀의하려는 정성을 품고 대대로 이어온 왕업을 지켜가고자, 감히 제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달라는 청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황제 폐하의 엄중하고도 귀한 승낙이 내려와 저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그 은택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상에 보기 드문 특별한 배려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선물로 주신 비단은 마치 구름과 노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은은 해와 달처럼 광채가 납니다. 기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교차하니, 이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커다란 영광입니다.

황제께서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을 보살피심이 이토록 두터우시고, 포용하시는 도량이 넓으시기에,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의 충성심을 잊지 않으시고 부족한 저의 정성을 가엽게 여겨주신 덕분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저는 이제 자나 깨나 더욱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지키고 황제 폐하를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운하에 작은 배를 타고 저어 갔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재미있는 부분은 '배를 같이 타고 천천히 노를 저어서 내려와 용산 여울 아래에 이르렀다'고 나오는데, 이는 배를 타고 용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용산은 배를 타고 가지 못한다.

 

 

궁궐 사방에 운하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위에 보이는 물레방아는 지름이 40피트였다. 이 장치는 로스앤젤레스 강의 물 일부를 끌어올려, 가정과 농지 그리고 저장 시설로 중력에 의해 흐를 수 있는 높이까지 올리는 데 사용되었다.

1857년, 윌리엄 드라이든은 수도 공급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권리를 시의회로부터 부여받았다. 이 시스템 아래에서, 잔하 마드레(Zanja Madre)를 통해 운반된 물을 저장하기 위해 광장 중심에 벽돌 저수지가 건설되었다. 또한 강에서 잔하 마드레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물레방아도 함께 설치되었다.

그 후 물은 목재 파이프 시스템을 통해 주요 거리 주변의 여러 가정으로 공급되었다.

 

1857년, 윌리엄 드라이든과 그가 새로 설립한 수도 회사인 로스앤젤레스 워터 웍스(주)는 LA 강에서 물을 끌어올려 도시의 주요 수로인 잔하 마드레(Zanja Madre)로 보내기 위해 높이 40피트의 물레방아를 설치했다. 이후 그는 1858년에 도시 광장 중심부에 큰 벽돌과 목재로 된 저장 탱크를 건설했으며, 이는 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장 시설은 약 10년간 그 자리에 있다가 분수로 교체되었다. 이후에도 물은 광장 주변부의 다른 저장 탱크들과 인근 저수지들에 계속 저장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초기 로스앤젤레스 물 저장소’ 참고).

 

사이에 작은 강들이 있다.

 

1900년대 초 LA항구 모습이다. 강폭이 상당하다.

 

1900년대초 LA항구 모습

 

1899년 LA항구 모습인데 지금은 다 막아 버렸다.

 

1930년 LA모습인데 이때도 강을 메우지 않고 있었다.

 

1937년 사진인데 아직 강을 메우지 않았다. 저기 선착장이 보인다.

 

예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복개해서 좁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저기 보이는 길이 운하였다.

지금은 도로로 만들어 그 흔적만 볼 수 있다.

좌우의 아치 계단이 바로 운하에서 내려 이동하는 동선이다.

모든 운하의 공통점이다.

베니스, 소주의 운하 모습과 흡사하다.

 

1930년대 강을 복개한 모습이다.

 

1920년대 배로 통과하는 모습이다.

 

LA 시내 운하의 모습이다.

 

LA 시내 운하의 모습이다.

 

LA 시내 운하의 모습이다.

 

LA 시내 운하의 모습이다.

 

LA 시내 운하의 모습이다.

 

 

큰 LA강이 보인다. 운하를 파서 집앞까지 물길이 있다.

 

LA항구 모습이다. 강이 복개되기 전 모습으로 아주 크다.

 

LA항구 모습이다.

 

 

 

 

 

LA운하 복개공사 하는 사진이다.

 

지도에 보면 아시아 대륙과 북미대륙은 붙어 있었다. 전세계가 하나의 땅이었다.

그래서 홍산과 북미 한양은 9역(말을 이용하는 역)이 있어 육로로 통행이 가능했다.

왕이 두개의 수도를 왕래하느라 힘들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이 있다.

 

 

베링해협에 핵폭탄을 엄청 터뜨린다.

수에즈운하 공사시에도 핵폭탄을 520개 터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화적인 핵무기를 만드는데에는 10회 이하면 되는데, 1,000회 이상을 한다는 것은 대륙의 틀을 바꾸는 행위이다.

 

 

 

<빛의 전사들 '한양은 LA 운하도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