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와 환생’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지혜라는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심은대로 거둔다 이것이 카르마 법칙이다.
당신이 악을 심으면 고통으로 악을 거둘 것이고 선을 심으면 기쁨으로 선을 거둘 것이다.
카르마를 이해하려면 생각이 물질임을 알아야 한다.
끝까지 분석해보면 우주자체가 물질이 아닌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물질은 생각의 힘에 반응한다.
의지력이 에너지에 지시하면 에너지가 물질에 작용하는 것이다.
물질이란 사실 에너지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졌기에 잠시 미몽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이 잠정적인 미몽 때문에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유한 존재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불멸하는 영혼이 한생의 학습으로 자기를 묶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자신의 영원불멸을 깨칠 때까지 여러번 생을 거듭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주의식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카르마가 무엇이고 인간이 왜 윤회를 반복하는가 하는 설명이 나와 있다.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있지만, 인간이 자신의 그 영원 불멸한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윤회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끌어당긴다.
악한 카르마를 지닌 영혼은 악한 가정에 태어나고, 선한 카르마를 지닌 영혼은 선한 가정에 태어난다. 악한 가정과 선한 가정이 자기 내면의 자력으로 영혼을 끌어당긴다. 악한 가정은 악한 영혼을 끌어당기고, 선한 가정은 선한 영혼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왜 조상의 업보를 자손이 감당해야 할까?
한 개인이 가진 카르마가 어떤 집안 어떤 부모의 카르마와 일치 않은 파동을 가지고 있을 때, 선하거나 악하거나 어떤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그 문제가 비슷하기 때문에 유유상종의 법칙에 의해서 이끌려서 그 가문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왜 하필 이런 부모 아래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하지, 내가 왜 이런 조상의 업보를 내가 물려받아서 고생하고 살고 있지, 이런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 같은 문제를 가진 영혼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같이 공부해 나가는 것이 하나의
가문이고 가정인 것이다.
같이 공부하는 이런 도반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자신의 선한 카르마 덕분에 많은 기회를 얻은 사람은 기회가 적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악한 카르마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는 영혼의 품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결국 본인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
자신이 지어 놓은 선한 카르마 덕분에 현생에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것을 누리고 살아가면 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면서 ‘아 나는 문제 없어’ 이러면서 아무렇게나 또 행동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들은 또 미래의 악업을 쌓아두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편안하고 가진 자원이 많다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나눌 수도 있고, 자기의 재능을 나눌 수도 있고, 좋은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고, 그렇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때 자신의 선한 카르마가 계속 쌓이게 되고, 지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아버지는 결코 당신 자녀들이 잠시 땅에 머물면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그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분이 아니다.
인간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해 그 결과로 고통을 받거나 선한 카르마로 그에 어울리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이라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한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것이다.
백만년 축적된 죄라 해도 그것이 그의 본질적이고 신성한 성품을 바꿀 수는 없다.
형제가 저지른 악행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분노가 영원한 지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개념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 것도 아니고, 주변의 사회나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내가 고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은 다른 사람에게 주변에게 피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이 자기가 과거에 지어 놓은 것들이 쌓여서 그 카르마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얘기는 성서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고, 요가난다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살아온 어떤 습관이 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큰 인간인 것도 맞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지금이 순간 깨어서 생각해 본다면 ‘내가 이 선택을 할까 저 선택을 할까’ 자유 의지로 분명히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아 그냥 살던 대로 살아 내 습성대로 살아’ 그러면은 자기 운명대로 정해진 운명대로 100% 살아갈 수밖에 없다.
깨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 의지를 좀 더 활용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정해진 운명에서 조금씩 벗어나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이 있고 불타는 지옥불이 있다’ 이런 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품은 분노나 복수심 이런 것을 투사한 얘기일 뿐이지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그런 벌을 주겠느냐, 사랑하는 이런 존재들을 어떻게 벌을 하시겠냐, 영원히 형벌을 받는 지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대로 살아가고 자기가 배우 한 것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동 때문에, 현재 고통을 받고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고 신을 탓할 것도 아니고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라.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게임일 뿐이다.
나의 패배를 영화 한편 보듯이 한걸음 떨어져서 보라.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것이 비록 슬프게 끝나는 비극이라 해도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참 좋은 이야기네 많은 걸 배웠어’ 이처럼 살다가 아프고 슬픈 일을 당하거든 그 일을 겪고 나서 자신에게 말해 주라. ‘대단한 경험이었어 많이 배웠다’.
체스는 검은 바탕과 흰 바탕이 서로 엇갈려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모든 어둠이 밝음에 슬픔이 기쁨에 실패가 성공해 있다.
변화와 갈등은 불가피한 것들이고 그 때문에 위대한 게임이 가능해진다.
그것들을 초연히 바라보자. 결코 그것들이 자기 안의 참자아를 더럽히게 놔두지 말라.
우리가 살다 보면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도 겪게 되는데 그것에 너무 몰입해서 괴로움에 집착해서 살아가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서 자기 인생 영화를 본다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좀 초연한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래 이것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웠을까, 그래 그것을 통해서 나의 부족한 점을 좀 깨우쳤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아 그때는 내가 그렇게 했어야지,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한 걸음씩 배워 나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 속에서 어떻게 되든지 이게 100% 진실이고 영원할 것 같고 이렇게 느끼지만 그것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고 있을까 내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지이 문제를 깨치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충분히 고찰을 해 보아야 한다.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다, 이제 이거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람 내면에 있는 잠재 의식의 문제가 풀리게 된다.
그것은 곧 카르마가 해결된다는 뜻이다.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 자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까 그것을 좀 더 성찰하고 초연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문제의 깊은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식에 박혀 있다.
우리가 지난날에 저지른 잘못된 행실로 그 뿌리를 내린 것이다.
누가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나를 해쳤다고 주장한다.
자기 스스로 그 일을 불렀다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이다.
자기 카르마의 자력으로 그런 해코지 또는 억울한 일을 불러들인 것이다.
자신에게 닥치는 나쁜 일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어떤 불행을 만나든 스스로 삶에 대한 책임을 지라.
자신의 본성에 숨어 있는 좋지 않은 성향을 없애겠다는 굳은 의지로 최선을 다하라.
남을 탓하기도 하고 이게 다 카르마 때문이야라고 카르마 그 자체를 탓하기도 한다.
결국에는 자신이 지난날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겪고 있는 일이니까, 남탓이 아니고 내가 과거에 지은 것을 역으로 받고 있구나, 그러면 내 안에 있는 그 악한 본성을 꺼내서 살펴보고 고쳐야 하는구나, 자기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이렇게 괴롭혔을 때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방식대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우리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참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영혼 의식 안에서 살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습관과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영혼 의식이 성장하는 만큼 카르마의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다.
카르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그런 것을 불교에서는 견성한다고 하고 깨어난다라고 말하는데 ‘아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구나, 아 이것은 옳은 길이구나,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겠다’이렇게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선한 본성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때 여러가지 카르마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과 합일되면 카르마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자기한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게 마땅하다.
명상을 통해 자기 카르마로 벗어난 영혼이 자기한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다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 제한된 카르마 법칙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영혼이 하느님처럼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신성한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명상 수행을 통해서 참자아를 만나고 그 상태에 머물러서 살아간다면 더 이상 습관에 빠져 살지 않고 더 이상 악한 카르마를 짓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상태가 된다면 자기한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명상도 하고 마음 공부도 하는데 왜 주변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계속 나타나지, 마음 공부 잠깐 한다고 몇 년 한다고 그게 갑자기 수백 수천년 수만년 된 카르마가 다 없어지는게 아니다.
과거의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인데, 자기 내면에 참자아를 만난 사람이라면 그 하느님의 마음으로 너그럽게 사람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지금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대상에 대해서 미움을 일으키고 분노를 일으키고 한다면 그런 생각과 감정이 다시 내 잠재의식에 쌓인다.
그러면 나는 그 참자아, 초의식의 상태에 머무르는게 아니고 지지고 볶고 싸우는 물질계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명상을 하고 초의식 상태에서 아무리 평온하게 있다가도 현실에 돌아오면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다시 자기 내면의 참자아를 돌아보면서 현실의 그 문제들에 대해서 좀 내려놓고 용서도 하고 이렇게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반복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야만 우리 내면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닦아내고 신성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하느님과 만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하루 일과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게 하라. 하루에 두 번 내면의 침묵에 잠기라.
새벽 제단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라.
하루를 마감하면서 밤의 신전에 고요히 앉아 어둠 속에서 번잡한 일상사를 벗어나라. 죽음과 환생의 단조로운 반복에 대해 깊이 묵상하라.
아직 몸으로 살고 있을 때 지난날 자기 카르마의 씨앗들을 소멸시키는 힘쓰라.
불로 익힌 씨는 싹 키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깊은 명상 속에서 자기 카르마의 씨앗들을 지혜의 불로 익힌 사람은 두 번 다시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카르마의 해결을 위해서 명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에서는 현실에서 겪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고 했다.
자기 혼자 있을 때 하루를 마감할 때 매일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깊은 명상 속에서 자기 내면에 참자아에 머무르는 시간을 가질 때 (그것이 현실을 살아갈 때도) 그 마음에 머무르는 힘이 되기 때문에 과거의 습관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에서 그 다음 장은 죽음과 환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에서 딱 한 부분만 소개해 보겠다.
요가난다가 성장기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 꼬마 사슴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 사슴이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요가난다가 사슴을 너무 사랑하니까 기도를 하게 된다.
“하느님이 있다면 그분이 사슴을 데려가지 않으실 거야”. 그리고 곧 명상을 시작했다.
세 시간쯤 뒤에 사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느님이 사슴을 나에게 돌려주셨던 거다 그러나 그 뒤에 내가 얻은 교훈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새벽 시까지 사슴과 함께 있다가 깜빡 잠들었다.
사슴이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네가 나를 붙잡고 그러지 마. 나를 놔줘. 제발 나를 가게 해달라”고 꿈속에서 내가 말했다. “그래 좋아” 그 꿈을 꾸고 일어나자 드디어 사슴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무지한 사람은 죽음이 사랑하는 친구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어떤 무엇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 그분의 기쁨
충만한 무한 공간으로 돌아간 것을 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 나고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니까 슬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태어날 때 망각의 강물을 마시고 태어나서 우리는 사후 세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막연하게 죽음이 무섭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은 모든 생물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이 정말 멋있었는데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지 만물은 하느님의 자기 표현이다.
죽음이란 하느님의 기쁨 충만한 무한 공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출처 : 세정님의 카르마와 환생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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