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아라사 제국(러시아)은 코리아 영토였다.

예덕나무 2024. 6. 14. 09:49

아라사 제국(러시아)은 코리아 영토였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주 중요하며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와 실제의 러시아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바 그 실체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자.
코리아의 근대사 전체가 걸려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1) 러시아의 의미


스페인의 남부지역 안달루시아의 루시가 러시아의 지명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북해 세계인 북코리아의 흔적을 찾아보자면, 우선 러시아의 국명이 아라사였던 것부터 확인해 보자. 


이 아라사가 무슨 의미일까?
아라사는 바라샤인 발샤에서 왔다.
바라샤는 보살의 북쪽 방언이다. 카스피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강 이름이 볼가강이다. 
‘볼가’는 발가인 ‘밝’의 그쪽 그쪽 발음이다. 
볼가강의 중류 중간 지점쯤에 타르타르 공화국이 나온다.
그 타르타르 공화국의 수도가 카잔이다. 
카잔의 이전 이름이 ‘볼고라’이다. 
볼고라는 밝달 유음화가 된 밝라, 밝 땅의 그쪽 발음과 표기이다.

카잔은 카샤의 땅이라는 말이다. 
카슈와 파슈는 같이 쓰이는 것과 같이 카샤는 파시와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카샤(카사, 파샤 즉 보살) + 냐(땅, 흙양壤) 카잔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 속에 실제 카잔은 현재의 모스크바 우측에 있는 타르타르 공화국이 아닌 카자흐스탄이 카잔이다. 
카자흐스탄이 바로 북코리아였다. 

대세지보살님이 북해의 법 짜르(법왕, 교황)님 이셨는데, 우습게도 러시아 역사에서는 러시아 황제를 부를 때 자르라는 이름을 살려서 부른다.
짜르 혹은 싸르 혹은 사리는 그래서 황제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북해의 타타르, 타르타르의 지명은 또한 중앙아시아 중원의 지명에서 유래했다. 
타타르의 경우도 한번 분석해 보자. 

태조 실록에서 ‘(목조 이안사가) 지원 원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그대로 알동(斡東) 천호千戶에 충원充員되었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고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함흥부 편에는 ’남쪽으로 함관령이 걸쳐 있고, 동북쪽으로는 장성이 휘돌아 감고 있는데, 이 땅은 달단(韃靼, TATAR) 땅이다. 

타타르 타르타르인 달단(韃靼, TATAR)이 의흥부義興部에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의흥義興의 군명의 귀성龜城 귀산龜山이라고 한다. 
귀성이란 제왕의 성인 한성 국내성으로 이곳에서 이동한 제국이 북해의 카자흐스탄이고 그들이 타타르였던 것이다. 

이곳 북해의 보살부를 수호하는 왕부의 세력들이 바로 아라인 러시아 제국이었다. 
루시, 아라사, 러시아는 슬라브(희랍, 서코리안)가 아닌 북코리아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를 모두 슬라브족이라고 호칭한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북코리아는 원래 슬라브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근대사에 시베리아 대학살을 벌인 악마 스탈린에게 답이 있다. 


(2) 키예프 공국

키예프 공국의 문명(슬라브 민족과 키예프 루스, 스키타이 황금 문명전) 
키예프 공국은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공통의 기원이며, 이 세 나라 사람들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어 주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에 있었던 박물관 특별전에 이들 키예프 공국의 문화 및 문맹의 스키타이 (소그드) 황금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스키타이란 아리안의 문화를 간직한 코리아의 개념이다.

유럽 역사를 들추어내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유럽의 모든 국가가 애초에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가 어느 시점에 종교를 개종 당하는 전부 다가 이러한 코미디의 논리이다.

‘후기 러시아인이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르의 공이 되었고, 류리크 일족이 동슬라브인의 거주 지역으로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 사이에서 몇 개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시로 불리게 되었지만, 루시라고 하는 명칭이 후에 러시아라는 국명의 어원이다.’

노르만인 유리크가 노브고르트의 공작이 되었고, 그의 일족이 동슬라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한다. 
유리크에게 공작의 작위를 부여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의 일족이 이동하는 과정에 몇게의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황제의 인가를 받은 주체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노브고르트의 고르트란 ‘고려 터’라는 의미로 유리크 공이 고려 터에서 키예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키에프 공국이 탄생하는 것으로 공국이란 공작의 봉지이다. 


<전성기> 

블라디미르 1세 때에 동방 정교회가 국교가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1054년)까지 최전성기였다. (*위키백과 참조)

키예프 공국의 왕위가 건국자인 유리크 공에서 블라디미르 1세인 왕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보겠다.

고려 정종定宗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 왕건의 둘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이며, 비는 문공황후 박씨와 문성왕후 박씨이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고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듬의 3월 서거하였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위키백과 참조)

정종 대왕의 죽음 자체가 코믹하다. 
키예프 공국을 건국한 유리크 공은 정종의 외조부 유긍달의 집안이며, 블라디미르 1세가 바로 고려 황제 고종이다. 

문제는 키프 왕국의 왕위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끊기면서 유씨에 의한 로마노프 공국 체제로 다시 부활한 것 같다. 즉 유긍달 유씨의 공국체제를 유지하다가 정종인 블라디미르 1세가 왕국을 유지했고, 이후 왕가의 대가 끊기면서 유씨의 공인 로마노프 체제가 다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뒤에서 증명해 보겠다.

블라디미르란? 
블라는 브라, 바라의 밝은이며, 디는 터 땅이다. 
밝은 땅에서 오신 황제가 블라디미르 이다. 

로마노프 왕조(Romanov dynasty) 
‘1613년 1917년 2월 혁명 전까지 러시아를 다스린 왕조. 
모스크바 대공 이반 1세 갈리타(1328~1341년 재위) 치하에서 살았던 모스크바 보야르 (대귀족)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캄빌라 라고도 함) 자손들로, 로마노프라는 성은 로만 유레프(1543년 죽음) 에서 따온 것이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는 동생 미하일에게 양위했으나, 다음날 미하일은 왕위를 거부했다. 니콜라이와 그의 직계 가족은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되었다. 나머지 로마노프 일가도 개로 도피하거나 처형당했다. (*위키백과 참조)

로마노프 왕조의 로마와 신성로마제국의 로마는 동일한 주체와 사람들이 사용했던 동일한 언어이다.
상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880년경 중원의 호족 유긍달의 집안이 중원의 황제로부터 키예프 공국의 봉지를 받고 키예프를 건국하며, 그리고 65년 이후 고려의 혜종이 몽골과 함께 키예프 공국을 지나 몽골인 마자르는 아바르제국의 영역인 헝가리에 정착하고, 고려 혜종은 이스탄불에 신성로마 제국을 건설하며, 이후 고려의 정종이 이동해서 키예프 공국의 영역에 정착하니, 이분이 고려 황제 정종인 블라디미르 1세이고, 이후 1598년 표도로 1세까지 왕위가 계승되었다가 15년간 끊기고 다시 유씨의 로마노프 왕조가 왕위를 물려받아 러시아 제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니콜라이 2세 아래 사진은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 니콜라이 2세이다


천천히 잘 보아주기 바란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윤치호와 민영환이다. 
오른쪽 끝이 니콜라이 2세이다. 

독자분들은 이 사진이 이상하다고 느껴야 정상이다. 
즉 아라사 제국의 황제 짜르인 니콜라이 2세와 중원의 신하인 윤치호와 민영환이 같은 위치의 자리에 속해 있다. 

중원에서는 황제와 신하가 같은 위치에서 속할 수 있을까? 
위의 사진을 보고 로마노프 왕조의 왕위가 고려 황가인 왕씨에서 유씨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소중한 사진이다.

벨라루스, 자 이제 또 다른 충격을 던져 보겠다. 
’벨라루스 공화국, 수도는 민스크이며, 민족 구성은 동슬라브족에 속하는 벨라루스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도 있다. 이 나라는 러시아와 가장 비슷한 민족이며,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벨라루스 라는 국명은 하얀 루스(벨라루스어 : 벨라야 루스)라 표현에서 왔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러시아로 벨로루시야(Belorussia)라고 불렀다. 
또 대한민국에서는 이로 인해 한때 백러시아(白러시아)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실제 벨라루스는 화이트 러시아를 의미한다.’(*위키백과 참조) 

벨라루스의 역사는 키에프의 역사와 같이 시작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면 벨라루시는 밝라루시로 밝은 밝 도인 부도이면서 박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고어古語에서 라羅, 나那는 땅의 의미로 밝라란 박의 땅이기도 하다. 
흰 것은 또한 밝은 것이기 때문에 백주白州는 밝주인 밝 터가 된다. 
그래서 백(白러, 밝은, 朴)러시아였던 것이다. 


자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면, 

‘고려 정종定宗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 왕건의 둘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이며, 비는 문공황후 박씨와 문성왕후 박씨이다. 

정종의 후비 
1. 문공왕후 박씨 
2. 문성왕후 박씨’ (*위키백과 참조) 

벨라루시가 고려 황제 정종의 황후 처가인 박씨들의 봉지로, 박 루시아가 백루시아로, 그리고 벨라루시가 변형된 것 같다.
고어에서 보, 배, 베, 박은 동일한 의미로 그 래서 밝달 민족을 배달 민족이라고도 표기한다. 

만해 한용운을 인용해 보자. 
한용운이 15살 되던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그때 그의 아버지와 형이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죽고 말았다.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여름 그의 나이 16세 부모님과 아내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났던 상황이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라는 그의 수필에 남아 있다. (*택리지/다음생각 신정일 지음)

놀랍지 않나? 
충청도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이 집을 떠나 시베리아를 거쳐 서울로 갔다고 한다. 
그러면 그 시베리아는 어디일까?
충청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울로 간다는 것은 충청도와 서울의 중간에 시베리아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사비르 사비인 부여로서, 시베리아란 샤 밝 터라는 우리말이다.
부여는 부리이며 고의 부도성 부리성 불이성인 국내성이다. 

이렇듯 시베리아는 우리의 지명이었다. 밝은 부도 박을 의미하므로 배는 박씨가 되기도 한다. 
고어에서 보, 배, 베는 밝은 부도 박朴을 의미하므로 시베는 박시(밝은 도시)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시대에 왜 백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를 학살한 적군들과 싸웠을까?

 

<아리안X의 영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