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동학혁명의 진실

예덕나무 2024. 6. 18. 13:35

1894년 3월 봉기(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그동안 알고 계셨던 강단 사학으로부터 배운 평생 도움이 되지 않을 근대 역사는 지금이 시간부터 모두 내려놓기 바란다. 그래야만 우리의 근대사 동학혁명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1) 코리안이란?

코리안이란 우리는 스스로 또는 외부인들이 우리를 코리안이라고 부른다. 이 코리를 한자로 표현하고 음한 것이 고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코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또한 한자 고려를 영어로 표현한 단지 영어 알파벳을 코리아의 코리라는 말로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즉 주객전도하여 알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 말들은 소위 말하면 우리 말과 한자의 음운이 혼용된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말들이 먼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한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상당히 쉬운 문제인데 전부 모르고 있다.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즉 표현할 뜻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표현할 뜻이 기존에 있었기 때문에 그 뜻을 단 한 글자의 한자로 그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말은 어떨까? 우리말 자체가 뜻이다. 우리말이 먼저 생기고 나서 나중에 그 우리말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한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한자가 만들어졌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그 하나를 표현하는 상당히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코리이다.

우리는 한 대상인 스키타이 아리안의 해탈인들을 두고 코리, 고리, 가리, 구리, 그루, 크로, 가야, 골, 켈트, 갈리, 깔리, 쿠르, 까레이, 카울리, 크리, 그리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말은 다양한 것 같지만 오직 한 가지의 동일한 의미이다. 
즉 이 수많은 이름들을 한자로 음차한 의미 바로 고려이다.

코리는 고려이고 고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불교국가이다.
코리와 크리는 동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그런데 서학인 기독교를 크리스트라고 한다.
크리는 코리인 고려이고, 트는 터 땅이다.

그런데 현재의 크리스트라고 하는 이들은 불교인들이 아니다.
내가 간절히 빌고 또는 절실히 믿으면 기적을 창출할 수 있고, 또한 기적을 믿고 있는 신과 인간의 수직관계, 즉 신의 종이 서학이다.

현재 서학의 일파을 카톨릭이라고 한다.
카톨릭의 카토는 샤카 터인 밝 달이다.
이들 서학이 왜 불교의 카터인 샤카 터라고 하는 것일까? 

스페인어로 이들 카톨릭의 성당을 까떼드랄(Cathedral)이라고 한다. 
까떼는 카톨릭의 카토와 동일한 카르 터인 샤카 터이고, 는 우리말 고어의 이며, 
은 알, 랄이다.

왜 스페인의 카톨릭과 성당인 까떼드랄은 천하의 천조와 왕부가 있었던 곳의 지명으로 불교의 용어인데 왜 현재 기적을 창출한다는 그 서학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일까?

서학인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미래의 구세주 메시아는 위키백과에서 불교의 미륵보살님이라고 나와 있다. 기가 막힌다.

도대체 이 서학인 기독교의 정체는 무엇일까?


(2) 동학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혁명의 동학이 왜 탄생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상기와 같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위치를 동東이라 이름 붙인다. 
극동의 현재 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일명 타당한 것 같이 느껴질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이 이 동학의 동東자를 붙였는지, 아니면 역사 조작자의 이 동자를 붙였는지는 그 이유를 한번 찾아보자.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의 포덕문과 논학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다.

‘묻기를 도는 천도로서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서학이라고 부릅니까? 

대답하기를 아니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천도라고 해도 학은 동이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로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겠는가?’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에서 동학의 도를 천도天道라고 한다. 
원불교의 천조가 있었던 개경을 천축국이라고 한다. 
천도와 천축에서 하늘 천天은 현재의 서학과 같이 내 죽어 영혼이 가는 저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그러한 하늘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 천조天朝가 있었던 지역 지명의 개념이다. (천조 (天朝) : 천자의 조정(朝廷)을 제후의 나라에서 일컫던 말)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지상이 천天이다. 죽으면 모든 것은 사라지며 공허하게 된다. 

종교宗敎란 뜻은 맏인 어른의 가르침이다.
이곳 천조가 있었던 개경의 천하의 宗家종가인 맏이기 때문에 이곳을 수도首都, 수양首陽이라고도 했다. 
이곳 하늘을 대신한 천하의 중조中朝인 천조天朝에서의 가르침이 바로 천도이고 천축이다.
동학의 천도는 서학과 같이 내 죽어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영혼이 떠돌다 찾아가는, 저 세상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는 하늘에 붕떠서 구름타고 있는 그러한 곳이 아니라, 내가 살아서 발 디디고 있는 이 땅의 이 세상인 지상천국이다.

동학의 천도와 불교의 천조가 있었던 천축국은 동일한 장소이다. 
즉 동학이 원불교인 것이다. 
현재 반도의 불교는 천조가 있었던 중아아시아 천축국 그 불교가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동학은 서양, 즉 기존의 불교 제국의 샤카 터였던 유럽의 카톨릭이 침범당하고, 무장과 무력으로 근대사에 등장해서 서유럽을 침공해서 정착한 대영제국과 그의 협력국의 침입으로부터 자기 천하인 The Korea 연방을 자각하여 자기 천하와 사해를 지키고 회복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일어났다

근대사의 무장 세력들이 유럽을 점령하면서 그 해탈의 불교인들의 마녀 사냥을 통해 종교를 개정하지 않으면 전부 도륙했던 것으로, 이러한 살육의 그 마지막 과정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그러면 이러한 마녀사냥식의 서세가 무력으로 동점하는 상황에서의 중원은 이들의 고유한 해탈 정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천도를 표현하고 행동했을까? 

신에게 종속된 기독교를 서西라고 하고, 신인합일 천인합일의 원 밝달교, 불교, 동학을 동東이라고 한다.
즉 세상은 동과 서 두 개라는 얘기이다. 

자 그러면 왜 이 불도학을 동학이라고 했을까?
동학의 뿌리는 천주학天主學이다.
동학의 본 주문을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侍天主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라고 한다.  (시천주侍天主 : 천도교에서,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으로, 한울님은 항상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 일)

우주와 만물을 묵묵히 변함없이 화생시키는 만물의 근원인 유일신이 천신인 천주(天主, 하날님)로 동학의 핵심 요체는 시천주이다. 

즉 조물주 천신인 천주를 내 몸에 모시는 내유신령의 박달학, 부도학, 불도학이기도 하며, 천인합일, 신인합일의 유, 불, 선이기도 하다.
불교와 동학은 모든 것을 내 마음 안에서 찾지, 기독교와 같이 신과 인간이 이원화된 객체로 객체로 외부의 전지전능한 신에게 빌고 비는 , 신에 종속된 그러한 인간들로 만드는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유신령, 천인합일, 신인합일의 원 시천주학이 근대사에 기적을 창출한다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우리의 천신인 내유신령의 하날님이 같다는 또는 동일하다고 하는 그들의 거짓 날조에 시천주학의 불도학을 동학과 서학이라고 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원의 중中이 동東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기적을 창출한다고 하며 인간을 신의 종으로 만든 그들 종교의 이름이 불교의 이름인 크리스트 였는지, 왜 그들의 종교 이름이 불교 용어인 카톨릭 또는 그들의 성당이 불교 용어의 까떼드랄인지는 이제 자못 선명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을 창충한다는 그들 서학의 이름들이 왜 불교의 크리스트, 카톨릭, 까떼드랄인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애국가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1만년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하날님인지, 아니면 기적을 창출하는 그들의 하나님인지 생각해 보자.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3) 천도天道란? 

동학의 경전 논문을 인용한다. 
‘무릇 천도天道란 형상이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고 지리란 넓은 것 같으나 방위가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한울에는 구성九星이 있어 땅의 구주九州와 응하였고, 땅에는 팔방八方이 있어 팔괘八卦와 응하였으니 차고 비고 서로 갈아드는 수는 있느나 동했다정했다 하며 변하고 바뀌는 이치는 없나니라. 음양이 고루어 백천 만물이 그속에서  화해지는 나지마는 사람이 가장 신령한 것이니라.’ 

상기 내용의 핵심은 하늘의 이치는 고유하고 항일한 세상사의 흐름과도 같아서, 서학과 같이 빌고 비는 사람들에 의해 항일하고 고요한 세상사의 흐름에 파문을 던지는 그러한 기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흐름은 변함없이 항일하며, 이 항일함 속에서 인간이 세상의 흐름과 합일한 인간 존엄과 중심을 지키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제 상商나라 탕왕의 제고制誥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인용한다. 
사기본기/을유문화사, 김원중 옮김에서 ‘탕이 처음에 박(상나라의 수도, 博都, 영흥)에 도읍을 정한 것은 선왕의 전철을 쫓은 것으로 천도遷都를 보고하기 위해 제고帝誥를 지었다.’

삼일신고의 제목을 보면 신이 인간들에게 포고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을 보면 제왈帝曰이라고 하여 황제께서 천하 인민에게 포고하는 내용으로 삼일신인 하날님, 안울님, 천신, 천주에 대하여 황제께서 포고한 것이다.

  1) 제帝께서 말씀하시길 너희 오가의 사람들아!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고 검은 것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형태도 질량도 없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으며, 텅 비어 아무것도 없지만, 어디에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상기의 왕의 제고는 다산 정약용의 천주학, 상제학과 일치되는 내용으로 다산은 유형의 하늘과 무인 영명주재의 하늘을 분리해서 무형의 하늘이 천주(한울, 천신, 하날)라는 것을 정립했다. 

  2) 천신(천주, 하날님, 한울님)은 그 위로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 계신다.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우주적 존재와 우주적 지혜와 우주적 능력)으로 하늘을 내시고 수없는 세계를 주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들을 창조하셨다. 그 일은 너무나도 세밀하여 먼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 일은 밝고도 밝으며 신령스럽고도 신령스러워서 감히 그 이름과 그 수량을 셀 수도 없다. 

성聲 즉 영가, 염불, 주문 수련과 기氣 즉 무도, 기공과 원願 즉 간절한 기원과 도禱  즉 기도로는 절대로 천신을 친히 만날 수 없나니, 너 자신의 성품에서 천신의 씨앗을 찾아야 한다. 천신은 너희 머리골에 이미 내려와 계신다‘고 했다.
우리의 천신은 밝고도 밝으며 신령스럽고도 신령스럽다고 했으며, 천신이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골에 이미 내려와 계신다는 내유신령, 천인합일, 신인합일의 가르침이다.

이제 한단고기를 인용한다.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임승국 중의 단군세기에서)

‘하늘의 법도는 유일하고 그 문은 둘이 아니다. 너희가 순전한 정성을 하나로 쭉 이어가면 너희 마음이 불천님의 마음이 된다. 하늘 법도는 항일한데,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라. 자기를 미루어 자신의 마음을(불천님의 항일한 마음으로) 붙잡아서 다른 사람도 그 마음을 (불천님의 항일한 마음으로) 붙잡도록 파급해 나가면, 사람들의 마음이 조화롭게 되기도 하고, 하늘 법도에 합치기도 한다. 천하만방의 온 제후국에 이 방법을 쓰면 된다.

너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너희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오로지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바로 지극히 불천님을 공경하는 것이니, 이것을 제후국들로 파급시켜 나가면 된다. 이것이 충효이니 너희가 이 도를 지극히 체현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벗어날 구멍이 있다.

충효 : 안으로 유일항일의 불천님 마음에 지극정성으로 집중하고(충은 중심이니 불천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적중시키라는 말이다) 밖으로 그 불천님 자체인 부모와 타인을 공경으로 모시라는 말이다.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기왕에 알고 있었던  군부독재 시절의 그 중요하는 얼마나 내용과 차원이 다른가? 

이러한 가르침과 문장은 참으로 일이관지하여 사무치는 지긋한 정성과 공경의 이치와 도리가 우리 심중의 중심을 꿰뚫고 와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도도하게 온천하로 넘쳐흘러 밀려가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듯 하다. 

전강선사는 판소리 창(서도창)으로 법문을 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이 기회에 법문의 한 구절만 인용한다.
- 한번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야 곧 너의 본성을 보니라.
- 오직 내가 나를 자각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이니
- 오직 내가 나를 자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 것이다. 

원불교(천도, 동학)는 대승불교이다. 
현 불교는 그 원불교의 그 수많은 부처님들을 전생불 혹은 전세불로 흐트 놓고 있다.
그래서 현 불교는 우리 동학의 원불교가 아닌 것이다.

원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 참전계경과 우파니샤드를 살펴보자.

참전계경, 제1조의 제1장
경敬이란 지극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신은 천신이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와 벼락과 천둥은 형태(모양)가 있는 하늘이고, 어떤 것도 보지 않음이 없고, 어떤 소리도 듣지 않음이 없는 존재(영명주재자, 한울님, 하날님)는 형태가 없는 하늘이다.
이 형태가 없는 하늘을 하늘의 하늘이라 이르고, 하늘의 하늘이 바로 천신(천주, 한울, 하날)이다.
사람들이 천신을 공경하지 않으면 천신이 사람들에게 감응하지 않아서 그것은 마치 초목이 비 이슬 서리 눈을 맞지 못해서 말라죽는 것과 같다.

이제 우파니샤드를 인용한다.
우파니샤드 기원전 만년경 중앙아시아 중원에서 북해인 카자흐스탄의 천산주 우파로 인류가 이동할 때 만들었던 경전으로, 우파인 윗 법왕청에서 니샷다, 즉 이었다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1절-변하는 것들의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신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그 어느 누구의 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5절-신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
6절-신을 보는 사람은 신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보느니 그는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리라.
7절-신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것이 같은 신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1장은 이사 우파니샤드(Isa Upanishad)이다.
이사(이어서)는 단절된 내 단절된 내 에고를 하날님 상제님과 이어서 하나로 연결, 통일, 합일, 천인합일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조상님의 지혜를 잘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2장은 깨나 우파니샤드(Kena Upanishad)이다.
참으로 험난한 현실 속에서 해쳐 나가느라 에고 속에 빠져서 잠들어 있던 내 신성과 지혜와 그 전통이 깨어나는 것을 말하고 혹은 깨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3장은 깨따 우파니샤드(Katha Upanishad)이다.
깨어나서 연결 통일 신인합일 천인합일을 이루었.다 어떻게 또 깨어나면 어떻게 라는 말이다.

어떠한가?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파니샤드란 기원전 3,897년경 신시개천의 불교 발생 이전부터 성립되었던 것으로, 우파니샤드란 우파인 윗 법왕청에서 니샷다, 이었다, 
즉 ‘성스러운 아리안의 해탈의 정신을 우파에서 이었다’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동학은 근대사에 똑똑한 한 인물에 의해 창조된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동학이 바로 한인님, 천왕님과 삼활, 삼제, 그리고 중국사 25사의 왕부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 불도학, 밝달학이었다.

<아리안X의 역사복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