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삶 영계

예수는 정말 윤회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예덕나무 2024. 5. 28. 16:05

성서에는 단 한군데 그가 제자에게 세례요한이 엘리아의 재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17장 12~13절)
예수는 윤회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 이가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17장 12~13절>
12절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또한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못보는 장님에 대하여 "주여,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 자신의 죄입니까, 또는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묻고 있는 대목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분명히 윤회를 암시했거나 또는 지적한 곳이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10절에 "사로 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로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13장 10절>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구절에는 윤리적 복수의 법칙이 대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과거 정통 그리스도교는 차츰 윤회와는 관계가 없는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해 버렸다.
그러나 어떻게 정통파가 언제나 바르게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선택하거나 거부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부들의 행적을 연구해 보면, 그들 가운데 다수가 윤회를 긍정했고, 공개적으로 설교했음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윤회라는 것은 영적 진화로 말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많은 연속적 생애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진화하는 것이다.
즉 어떤 때는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한 신분으로, 왕자로 어떤 민족에 태어나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또 다른 민족으로 태어나기도 하면서 마침내 영혼은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적 진화의 과정이다.

영혼은 밤마다 다른 분장을 하고 다른 역을 연출하는 배우와 같다.
어떤 시기에는 물질적인 육체라는 장갑을 끼고 있다가 그것이 다 낡아지면 벗어버리고 또 다른 장갑을 갈아 끼는 손과도 같다.

북반구의 지식인 가운데 이런 사상을 받아들여 여기에 대하여 연구하고 책을 저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철저하게 윤회를 믿었다.
에머슨, 휘트먼, 괴테, 브르노수, 프로티누스, 피타고라스, 플라톤도 모두 그러하다.

붓다는 일찌기 "그대 스스로가 남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느끼는 행위로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했다.
또한 "이것은 의무의 으뜸이라. 자기가 당했을 때 고통을 느끼는 그런 행위를 남들에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힌두교는 가르친다.

힌두교나 불교도 사랑의 법칙과 윤회라는 영적 빈화의 법칙 사이에 아무런 분열이나 모순도 인정하지 않는다.
힌두교나 불교는 오히려 윤회의 법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두 법칙사이에 모순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루빨리 유치한  '천국과 지옥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긴 대장정이라는 것을 알고, 하루하루를 책임있고 보람차게 살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않도록 주의하며 살아가야 된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 뭐 있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은 중요한 무엇이 있다'라고 생각을 바꾸자^^